사후 78주년에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

() 이현속(李鉉續, 1900~1945) 전도사가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

고(故) 이현속(李鉉續, 1900~1945) 전도사가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으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고(故) 이현속(李鉉續, 1900~1945) 전도사가 지난 1일 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서울 유관순기념관)에서 윤석열 대통령으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손자 이충길 장로(예장고신 경남마산노회 부봉교회 은퇴 장로)가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은 1940년부터 경남 진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체포돼 1945523일 평양 형무소에서 옥중 순교한 이현속 전도사의 애국정신과 항일정신을 기려 수여되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이현속 전도사는 사후 78주년에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충길 장로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회장 정헌교목사) 일제강점기 순교자 코너에 소개된 이현속 전도사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이현속은 18961212일 경상남도 함안군 신일면 부봉리 705번지에서 부친 이수목과 모친 하구류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현속은 다른 양반집 자제들처럼 어려서 한문을 공부했고 특별히 논어를 좋아했다. 191015세가 되던 해, 남양홍을 맞아 결혼하였다.

 

이현속은 1911년에 기독교에 귀의하고 입교 10년 만에 부봉교회 영수가 되었고 4년 후 장로로 장립되었다. 장로가 된 이현속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성경에 무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해 진주성경학교 별과에 입학하여 1년 후에 졸업하였다.

 

1920년대의 한국교회의 교세는 20만을 넘지 못하였다. 신학생이 드물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전도사로서 일선교역을 담당했다. 이 전도사는 성경학교를 졸업하면서 영산교회에서 1년을 봉직하고 이듬해 4월에 전양 문산교회로 부임해 4년 동안 봉직했다.

 

1930년대 들어 하동교회로 옮긴 이 장로는 그곳에서 무려 7개 교회를 아울러 섬겼다. 여러 교회를 순회전도하던 이 전도사는 미숫가루를 양식으로 삼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지만 그 나라 건설을 위해 충성했다.

이 현 속 ( 李 鉉 續 , 1900 ~ 1945 ) “ 경남 부봉교회 신앙의 자존심 ” /생년월일 : 1900년 12월 12일/ 활동시기 : 1914-1945년 (일제강점기)/ 출생지 : 경남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705번지/ 순교일 : 1945년 5월 23일/ 순교지 : 평양형무소/ 직분 : 장로(전도사)교단 : 장로교 고신.
이 현 속 ( 李 鉉 續 , 1900 ~ 1945 ) “ 경남 부봉교회 신앙의 자존심 ” /생년월일 : 1900년 12월 12일/ 활동시기 : 1914-1945년 (일제강점기)/ 출생지 : 경남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705번지/ 순교일 : 1945년 5월 23일/ 순교지 : 평양형무소/ 직분 : 장로(전도사)/ 교단 : 장로교 고신.

1933년 산청에 덕산교회를 개척하여 부임하고 193540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던 중 1938년 덕산교회를 떠나 상촌교회를 개척했다. 19389월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신학교가 폐교되었고 이장로는 신사참배 결의에 슬퍼하였다.

 

19402월 호주선교사 커닝햄선교사의 주선으로 진주 배돈병원 원목으로 부임하여 병자들을 돌보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8월에 유치장으로 끌려가 물고문, 손톱 밑 찌르기, 손가락 주리 틀기, 공중 매달기 등 걸음조차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고문당하고 3일 후에 나왔다.

 

그 후 몇 차례 재판 없이 옥고를 치루고 계속 저항하자 12월 부산북부경찰서로 압송하고 1941년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 전도사는 고문을 받을 때 너무 견딜 수 없으면 찬송을 불렀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경찰들은 이 전도사를 중죄인으로 분류하여 손을 뒤로 묶은 채 독방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옥고를 치루는 동안 이 전도사의 아내는 이 전도사의 생각에 겨울에도 이불을 펴고 눕지 못 했다. 교회가 일본에 징발되자 방을 기도실로 삼고 기도와 독경생활을 하던 중 병을 얻어 1943년에 아버지나라로 옮겨갔다. 이현속 전도사는 아내의 소식을 듣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였고 금식 기도도 하곤 하였다. 이후 1945523일에 해방 3개월을 앞두고 평양감옥에서 순교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한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1873.12.15.~1941.12.4.) 선생이 바로 그 예이다.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1873.12.15.~1941.12.4.) 선생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1873.12.15.~1941.12.4.) 선생

그는 19059월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평양선교지부에 배치되어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선생으로 부임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등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다가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28년 다시 돌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30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선생이 있는 숭실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독교 사목과 목적에 맞지 않는다면서 계속 거부 의사를 표명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섰다.

1936118일 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 교장과 120일 숭실전문학교 교장 직위를 취소당했다.

선생은 위와 같이 외국인으로서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 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1963년에 이미 독립운동으로 인정되었다. 이현속 전도사의 이번 수상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독립운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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