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진 교회

김동진 목사[일산하나교회 담임]

우한 코로나 사태로 인한 위험이 아직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발생 초기의 긴장감은 이제 피로감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교회를 향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야말로 당국의 말을 무시하는 조직처럼 대중에게 비춰지고 있으며 이러한 시선을 언론이 앞다퉈 공론화하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공식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마치 교회에 가면 바로 감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 방역 당국은 눈앞에 놓인 면책의 좋은 재료인 교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전달된 감염의 책임은 이제 몇몇 이단과 비상식적인 교회들의 방역 실태를 통해 왜곡되어 교회 전체가 마치 같은 수준인 것처럼 묘사되고 그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혐오’라는 낙인이 찍힌 교회

이러한 우울한 상황 속에서 교회 가운데 일어나는 몇몇 아름다운 움직임이 가뭄 속 단비처럼 느껴진다. 주일에 예배를 진행하는 교회들 중 여러 교회들이 솔선하여 방역하는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로 ‘#방역은교회처럼’이라는 문구를 다는 작은 움직임이 SNS를 통해 퍼지고 있다. 그중 한 교회는 시청직원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지혜로움까지 더해서 주변인들의 칭찬을 듣기도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교회는 과연 질타 혹은 혐오의 대상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세상의 손가락질에 교회 스스로가 너무 움츠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론의 뭇매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현실이 교회의 입장에서 너무나 과한 처사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세상은 맹목적으로 교회에게 ‘혐오’라는 낙인을 찍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이 낙인을 찍은 것일까?

 

교회 혐오에는 의도적 배경이 있다

교회가 비난의 화살을 맞은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90년대 교회의 위기가 대두되면서 그와 동시에 비판은 비난으로, 비난은 혐오로 점차 바뀌어 갔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변화는 한국교회가 지난날 양적인 성장을 이룬 가운데 사역자들의 비윤리와 비인격적 모순과 교인들의 세속화 등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일차적 원인 제공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분적인 부패와 그에 따른 대처 미흡이 교회 전체의 부패로 보이도록 하는 시각은 분명 외부에서 조장된 것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외부적 요인이 작게는 안티 크리스천에서부터 크게는 좌익적 세력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에 따라 그 범주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과도하게 매도되는 일에 누군가가 충분히 영향을 미쳤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좌경화된 신학(해방, 민중, 젠더, 퀴어, 페미 등)의 공공연한 내부적 분열 조장과 자칭 진보적 기독 언론들의 도를 넘은 내부 고발은 교회가 세상보다 더 타락한 조직인 것처럼 변질된 이미지를 교회에 씌우기에 충분했다.

 

한국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가적 재앙이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국난극복을 위해 일어선 것이 교회이다. 구한말 영.미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으로 미개했던 국민을 계몽한 것도, 일제에서 나라를 구하고 자유민주공화국을 이 땅에 세운 것도 교회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에서 가능했다. 6·25동란 이후에 나라의 재건에 앞장선 것도 교회였고, 또한 왕정과 일정에서 막 벗어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익숙지 않은 자유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 그리고 윤리의식을 성경과 신앙을 통해 가르친 것도 교회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의정부에 위치한 동행교회(합동). 방문한 공무원에게 편지와 선물 증정

 

세상보다 하등한 조직일 수 없다
그렇다고 교회를 무조건적으로 칭송하자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교회가 완전한 조직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하등한 조직일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 세상의 모든 조직처럼 언제나 부패성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태생적으로 교회는 세상과 근본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제도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는 온 우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로 부패를 내재하는 모든 세상 영역 가운데 거룩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세상보다 하등할 수 없는 조직임이 자명한 것이다. 교회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삼위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조직이기 때문이다.

 

왜곡 조작된 교회의 이미지를 벗자
그러므로 이제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제공한 부정적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그에 동조하며 현재까지 왔다. 우리의 치부를 인정하고 자책하면 언젠가 교회도 변화되고 세상도 그러한 우리를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받아든 꼬리표는 왜곡과 조작의 훼손된 교회의 이미지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며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모습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교회가 그러한 불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악하고 부패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절대적 옳음의 가치와 방향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교리 신학적 견고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선행되어야 할 것은 교리적 견고함으로 보인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공예배의 논란은 결국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가볍게 보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교회 내적으로 교리와 신학적 준비가 미흡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사태가 장기화함에 따라 대부분의 교회가 공예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해프닝은 앞으로 계속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다양한 곳에서 조율되지 못한 잡음들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율이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사안에 따른 준비가 되어있어야 앞으로 차별금지법과 문화다양성, 학생인권조례 등 교회가 다뤄야 할 법과 제도, 윤리적 측면에서의 확실한 교리적 접근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종교라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세상은 교회가 종교라는 테두리에 속해있기를 원한다. 그것은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 내면의 안정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법회나 성당의 미사와 같이 교회의 예배도 동일한 잣대로 다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의 영역에 갇힌다면 교회는 그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 활동무대는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세상이 짜놓은 기준에 교회를 맞추려고 하던 시도를 벗어나 오히려 세상의 기준보다 더 고차원적인 가치인 성경적 기준에서 바라보며 세상과 소통하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교회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교회는 이미 이러한 시도가 가능함을 이번 우한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주었다. 성경적 가치에서 예배를 수호하고 사회적 협력의 범위에서 최고의 방역을 진행하는 이런 모습은 교회가 세상의 평가보다 훨씬 상위적 가치를 수반한 조직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 시점에 한 번쯤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해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서로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할 때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누가 빛과 소금으로 우리를 부르셨는가?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셨음을 바로 알자. 세상은 우리가 착한 행실을 펼쳐야 할 사역의 현장이며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곳이지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며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이 시점에 교회가 다시 본질을 깨닫고 진리 편에서 세상에 빛을 비추는 주님의 도구가 되길 기대해본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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