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다양한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게 하는가?

노승주 전도사(리폼드미니스트리 대표)

무엇보다 먼저, 모든 문화에는 각기 그들의 신앙이 자리하고 있음을 우린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정치, 문화적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부여하신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온전히 의존적일 때에 건강한 상태에 처해 있었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책무는 그릇된 신앙으로 향하고 있다.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이 책무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는 인간이 정복하여 개발시켜야 할 땅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고,1) 참된 사명을 잃은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을 대항하는 목적으로 이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열심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라는 영역은 오직 두 부류로 구분될 뿐이다. 계시의존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신앙의 문화와 죄악의 본성을 따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맞서 싸우고자 하는 신앙의 문화, 오직 이 둘 뿐이다. 진리의 빛이 인간 본성에게 비추어지지 못한다면 인간이 세우고 가꾸어가는 어떠한 문화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관점으로 아무리 선한 것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결국 진리가 우리의 모든 삶의 기반이 되지 못했을 때, 그 문화는 결국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이 거짓된 신앙이 세우는 문화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결국 성도가 추구하고 바라보는 문화와 불신자가 추구하는 문화는 모두 각자의 종교성을 띄고 있음을 발견해야 하며, 이러한 이방 문화는 결국 성도의 문화와는 상반되는 종교성을 띄고 있음을 바르게 깨닫고 견고히 해야 한다. 필자는 일반 문화가 기독교와 무조건적으로 상반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오랜 역사 가운데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 문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이 세상을 주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신자의 문화와 성도의 문화에는 서로 각기 다른 종교적 방향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문화관을 이방 문화 또는 불신자, 이교도들에 대해 폐쇄적이며 개방적이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이에 대해 동의한다. 그러나 우린 기독교만큼이나 개방적인 종교 또한 없다는 사실에도 동의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나 이방인에 대하여 결코 배제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는가?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이었다(롬 11:13; 갈 2:8; 딤전 2:7). 그를 통해 이방인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구원의 영역에선 결코 이방 문화에 대한 벽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어떠한 행위와 혈통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의 이방인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결코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방 문화에 대하여 엄격하게 배제하고 타협을 해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히는 바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민족을 말살할 것을 요구하셨다. 조금의 타협도 없이 그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소유까지도 진멸해 바치기를 요구하실 때가 있었다. 이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과 동시에 이방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통해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시의 육체적 편안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채, 이방 문화를 수용했을 때에 이스라엘에겐 어떤 결과가 찾아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대한 우상 숭배와 타락함이었다. 즉, 하나님께선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며 유혹할 수 있는 이방 문화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배제, 조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께선 결코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폐쇄적인 자세를 취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을 벗어난 다양한 문화의 영역을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할 사명지로 허락하셨으며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을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때때로 분명하게 이방 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폐쇄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밝히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문화가 기독교의 신앙을 위협하며 혼잡하게 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과 하나 되려 할 때이다. 그 때 만큼은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분명한 배제와 철저하고 냉철한, 그리고 폐쇄적인 자세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의 말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세상 가운데 “문화를 보호하는 수호자들”이다.2) 왜냐하면 복음만이 유일한 진리이며 우리에게 바른 빛을 비추고 우리의 죄성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하여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결코 어떠한 문화라고 할지라도 순전하지도, 선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들 가운데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지를 바르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은 문화 다양성 조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이번 시리즈 칼럼을 통해 보는 바와 같이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자는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대한 타협과 수용의 문을 열게 되며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게 될 것임을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린 이 법안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이번 시리즈 칼럼을 요약, 정리하며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한 후 이번 칼럼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첫째, ‘문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법안은 여러 순기능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차별 금지법’, ‘학생인권조례’와 같이 기본취지가 왜곡되어 진리에서 벗어난 제도를 조장할 수 있는 독소조항을 지니고 있다.

둘째, ‘문화 다양성 조례’가 품고 있는 독소조항이 사회적, 종교적, 윤리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삭제하지 않고 부추기는 현 상황은 이 법안이 담고 있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한국의 경우 ‘문화 다양성 조례’가 퀴어문화를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정황이 빈번히 포착되고 있으며 무분별한 문화의 수용은 공교육과 표현을 법적으로 제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 다양성 조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참된 자유를 빼앗고 위협하는 역설을 담고 있기에 한국 교회는 바른 목소리로 이 법안을 반대할 필요가 있다.

넷째, 기독교인은 다양한 문화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보는 개방적인 자세를 지님과 동시에 문화의 수용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며 타협시킬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철저히 배제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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