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일산하나교회 담임, 목동TV 대표)

얼마 전 공직선거법 개정안 통과 후 선거권 연령이 만 18세로 낮아짐에 따라 각 정당들의 젊은층을 향한 표심잡기가 활발해지는 모양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찾아가 ‘축 선거’라는 피켓을 드는 정당이 있는가 하면 ‘18세 청소년 입당식’을 성대히 열어주며 당대표가 눈시울을 붉히는 전략을 사용하는 정당도 눈에 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두고볼 일이겠으나 교내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일은 더욱 힘들게 된 듯해 보인다. 이러한 젊은 층에 대한 환심사기 전략은 설연휴 기간동안 길거리에 부착된 정당들의 새해인사 플래카드에도 어느 정도 가미가 되어있는 듯하다. 그중 눈에 띄는 플래카드에 시선을 집중해보려 한다. 혹자는 바쁜 세상사에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한다면 독자에게 피로감을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눈에 띄는 사안에 함구하는 것도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정당의 플래카드에 담긴 중의적 표현은 해석에 따라 가벼운 재치로 넘길 수도 있지만, 그 확대된 의미 해석으로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젊은 세대의 우려스러운 단면을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그 플래카드의 글귀가 무엇일까? 세 가지 글귀 속 숨겨진 의미와 이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태도는 무엇인지 짚어보도록 하자.

설 연휴 내걸린 현수막. JTBC 뉴스룸 갈무리

[“남자친구 있어?” 여자친구 있는데요.]

먼저 플래카드로 내건 문구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 속 “여자친구 있는데요.”라고 답하라는 지침을 전하는 듯한 플래카드다. 본 질문은 설명절에 흔히 어르신들께서 자녀들에게 인사처럼 던지시는 질문이지만 젊은 층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표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 바로 아래를 보면 어르신의 말을 맞받아치는 듯한 답변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대답은 아마도 이와 연관된 상황에 놓인 많은 청년들에게 가슴 시원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전략적 문구일 것이다.

이 문구는 또다른 해석도 가능해보인다. 그것은 이성친구가 있냐는 말에 주눅들지 말고 동성친구가 있다는 말로 당당하게 맞서라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나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나가면 이 동성친구가 경우에 따라서는 ‘동성간 사랑을 나누는(동성애) 친구’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같은 플래카드 한 켠에 적어놓은 “모두가 평등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의도성 짙은 인사말을 보면 충분히 이를 염두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당은 ‘차별금지법’과 ‘성평등조례’와 같은 ‘성주류화’를 주요 정책으로 삼는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중의적 표현 속에 자신들이 담고자 하는 의미를 충실히 담았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과한 우려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려로만 둘 수 없는 것은 점차적으로 동성애와 성윤리에 관한 성경적 입장이 그 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은 그저 좌시할 수 없는 시점에 왔음을 이제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절 연휴 전 한 교회의 토론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발언은 이러한 현실을 대변해주기에 충분해보인다. 심의원은 이날 “교회에서 설교 중 차별금지법을 어기는 발언을 하면 처벌을 받게되느냐”는 질문에 “처벌되겠지요”라고 발언하여 교계에 큰 이슈가 된 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 플래카드에 쓰인 글귀는 앞으로 일어날 ‘차별금지법’과 같은 독소조항이 존재하는 법안를 향한 그들의 소정의 목표가 얼마나 선명한지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순리를 거스르는 이러한 행태를 포장한 글귀를 분별할 줄 아는 모습은 그리스도인, 특별히 기독 청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세라고 보여진다.

[“결혼 언제하니?” 혼자서도 행복한데요.]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비혼주의를 지향하는 표현 속에서 이것이 그저 과한 해석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두 번째 플래카드는 “결혼 언제하니”라는 표현을 “혼자서도 행복한데요.”라고 당당히 말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문구는 얼핏보면 혼기를 놓치면 어쩌나하는 어른들의 걱정 어린 질문에 “저는 아직 괜찮아요”라고 가볍게 넘기는 수준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혼자서도 행복한데 결혼 같은 걸 왜 해요?”라고 들릴 수도 있는 답변이다. 후자의 경우 결혼제도의 부정, 비혼주의까지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혼자서도 행복한데요”라는 문구 속에는 근래에 나타난 신조어인 혼밥, 혼술, 혼행, 혼공, 솔캠 등 1인 가구 문화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적 흐름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결혼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의 굴레에 순응하지 말고 시대적 흐름을 당당히 누리라는 메시지가 가미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설 명절에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가운데 결혼이 아닌 비혼을 주장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듯한 이 문구는 가족제도의 균열을 부추기는 모습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어서 젊은 층에게는 호응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시간을 살아온 세대에게는 불편한 멘트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혼주의는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는 큰 범주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자발과 비자발을 떠나서 젊은 날의 쾌락과 유흥을 좀 더 누리고자 비혼을 주장하는 세속적 기준과 비용문제, 출산, 육아 등 개인의 사생활과 재정을 침해받기 싫어하는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적 이기심이 이러한 현상을 지탱하는 근거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바울이 제시한 예외조항을 제외한다면 결혼에 대한 성경적 접근은 선택이 아닌 책임과 의무로 여겨져야 함이 마땅하겠다. 또한 이것은 불필요한 굴레가 아닌 아름다운 연합임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말씀은 결혼의 의무와 함께 가족제도를 만드신 것이 하나님이며 이는 가족제도가 인간사회 모든 조직의 근간임을 잘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개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가 가정을 통해서 더 온전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고 연합과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기적인 연합을 배우는 거룩한 교회로서의 가정(엡 5:32)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젊은 세대 안에 세상의 풍조와 쾌락을 쫓거나 돈이 우상이 되어 비혼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인 결혼과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자세가 다시금 세워져야 한다.

설 연휴 내걸린 현수막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다. JTBC 뉴스룸 갈무리

[꼰대 프레임 “라떼는 말이야”]

앞선 플래카드에서 기성세대를 향한 불편한 일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성 세대를 불편케하는 문구는 또 하나의 플래카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흔히 요즘 유행어 중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는 과거의 경험을 일러주는 기성세대의 표현방식을 애둘러 비꼬며 젊은이들의 웃음 코드가 되었다. 플래카드는 만약 이런 기성세대의 말이 시작되면 여지없이 젊은 층은 “안 물어봤어요. 안 궁금합니다(안물안궁)”로 되받으라는 지침을 알려주고 있다. 웃을 수 있는 표현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기성세대의 경험과 가치를 무시하는 태도를 지향하는 문구라고 하겠다. 이는 현재에도 물과 기름처럼 멀어져있는 세대 간의 갈등을 더욱 조장하는 것으로 아직 경험과 지식적으로 배울 것이 많은 젊은 층이 기성세대의 가치있고 축적된 지혜의 유산을 평가절하하여 폐기 처분토록 만드는 언사가 아닐까 우려된다. 그런 면에서 젊은이들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이 정당의 플래카드는 과연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소통의 단절을 부추기며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것이 만약 성격적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라면 좋겠으나 인본주의적 가치 기준을 따르는 그들 속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은 기독 청년으로서 단순히 젊은 세대를 대변해준다는 저들의 태제를 쫓아 무분별하게 기성세대를 비꼬거나 비하하고 있다면 다시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자리에 서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물론 어른이 하는 말이 다 옳다고 할 수도 없으며(욥 32:9), 간혹 말과 행동이 다른 기성세대(기독인을 포함)의 추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윗과 모세도 그 어두운 면(살인)이 있듯이 모든 인간 내면 속에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을 생각하면 누구도 도덕과 윤리로 완벽하다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성세대는 우리가 분명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겠다. 이는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치는 젊은 세대가 살아보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성경은 기성세대에 대해 그들의 가르침과 조언을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받으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어린 사람들을 따랐던 르호보암의 길(왕상 12:8)은 우리가 분명 상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사사기의 암흑은 하나님을 아는 세대가 그의 자녀 세대에게 바른 가치를 물려주지 못함으로 일어난 ‘다른 세대’(삿 2:10)의 등장으로 비롯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플래카드의 몇자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의미는 분명 남다르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는 사상 전쟁으로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다. 세대 간의 붙통과 불화 이면에는 분명 사상적 다름이 존재하고 이를 조장하는 자들로 인해 더욱 심화 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골은 다시 봉합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깊은 골을 봉합하는 움직임이 교계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본주의적 사단의 올무에 빠진 이 사회가 병들어 있음을 진단해 주고 다시금 회복의 길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이며 그것을 담당한 조직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젊은 세대에게 인본주의를 표방한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발빠르게 진단하고 대응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우리는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처럼 한없이 스스로를 작게 여기도록 만든 저들의 얄팍한 속임수를 거둬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도덕적 흠결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몸으로 칭해주셨기 때문에 그 가치가 거룩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상이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도덕적 윤리적 자생 능력이 교회에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교회는 조직적인 교회 비판 여론에 휘둘려 각성의 기회마저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고 교회로서의 부르심에 다시금 깨어 일어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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