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b. 영아살해

이상원(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대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

영아살해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독특한 존재라는 인간관을 포기할 경우 생명윤리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왜곡된 의료관행이다. 영아살해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든, 음식물투여 등과 같이 어린이의 생존에 중요한 통상적인 돌봄을 거부하는 방법을 통해서든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뜻한다.

쉐퍼는 영아살해는 언제나 어린이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온 의료계에서 자행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1975년 캘리포니아의 소노마에서는 신생아집중간호에 있어서의 윤리문제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소노마 회의로 알려진 이 회의에 참석한 20명의 회원들 가운데 17명이 자기생존능력이 있는 신생아들, 곧 어떤 형태의 기술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영양만 공급되면 살 수 있는 영아들을 직접 손을 대어 죽이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음식물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굶겨서 죽이는 것은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했다. 마르타 윌링(Martha Willing)은 산아제한의 목적을 위해서도 영아살해가 이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셋째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불임시술을 받아야 하고, 만일 불임시술을 받기 위하여 병원에 나타나지 않으면 출생증명서 발급을 거부해야 하며, 적절하지 못한 유전자 풀이 유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셋째 아이는 출생현장에서 불임시술을 해야 한다”는 소름끼치는 주장을 전개했다.

소노마 회의를 통하여 나타난 의료계의 입장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표출된 것이 아니다. 많은 유전학자들, 의학자들, 윤리학자들, 신학자들, 심지어는 교회들이 영아살해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왔다. 1973년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던 유전공학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유아가 생후 3일이 될 때까지 살아 있는 것으로 선언되지 않으면 부모의 동의하에 아이가 고통과 불행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의사가 아이를 죽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왓슨은 이것이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동정적인 태도라고 말한다. 왓슨과 노벨상 공동수상자인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도 일정한 유전자 검사를 통과하기 전에는 일부 신생아는 인간으로 선언되어서는 안 되며, 유전자 검사에서 기준에 미달될 경우에는 살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인 밀라드 에베레트(Milard S. Everett)는 사회적 장애를 겪을 것이 분명한 영아는 살아있는 자들의 사회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장 명료하게 영아살해 지지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예일대학교 의과대학의 레이몬드 더프(Reymond S. Duff)와 에이 캠프벨(A,G,M. Campbell)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끝이 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보이는 짐”으로부터 신생아의 부모들과 형제자매들을 구해내기 위한 목적이라면 신생아를 죽게 내버려 두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생아란 “몸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물건(built-in obsolescence)”과도 같아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유용하면 달고 다니고 거추장스러우면 떼어내 버려도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쉐퍼는 영아살해행위를 사회에 짐이 된다고 간주된 사람들을 제거했던 나찌정권의 만행과 노예시장에서 흑인 노예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을 가축처럼 거래했던 초창기 미국의 인간생명경시행동에 비유하면서, 심지어는 종교인들도 이 행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웨슬리신학교의 필립 워거만(Philip Wogaman)은 하나님은 현존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자라나고 있으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낙태의 권리를 지지하는 종교인들의 연합’이 추구하는 대의를 지지했다. 1977년 캐나다 성공회의 전략팀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행동과 지능의 자취도 발견되지 않지만, 인간처럼 보이는 형태들을 인간처럼 다루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며, 이와 같은 결함이 있는 영아들을 인간답게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이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아살해관행이 아무런 비판 없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영아살해는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반체제 지식인들까지 잔인하게 살해한 독재정권의 만행에 비견할 만한 행태이며(J. Engelburt Dumphy), 인종, 신앙, 피부색, 가난 등의 이유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과 같은 인종차별행위이며(Robert D. Zachary),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장애자들의 삶의 현실을 무시한 행동이다. 장애자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일 뿐이다. 처음에는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영아살해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이 원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서는 장애나 중증질환을 가진 성인에 대해서까지 확대 적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예컨대 만성 심폐증이나 단장증후군 또는 다양한 형태의 뇌손상을 가진 영아를 죽도록 방치해도 좋다면, 동일한 질병을 가진 성인을 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영아살해는 “생존할 가능성이 없는 영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은 아니지만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는 영아들을 죽이는 행위”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II-c. 안락사

술과 약물복용의 부작용으로 의식을 잃은 카렌 퀸란(Karen Quinlan) 사건은 미국에서 안락사논쟁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카렌으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도록 허용해 달라는 카렌가족의 요청에 대하여 뉴저지 지방법원은 이 행위는 살인행위라는 이유를 들어서 기각한 반면에 뉴저지 대법원은 지방법원의 판결을 번복함으로써 호흡기제거를 허용했다. 그런데 카렌은 의료진의 판단과는 다르게 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계속하여 숨을 쉬었다.

카렌 사건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했다. “사회는 원하지 않거나 불완전하거나 불편하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태아나 유아를 죽이듯이, 원하지 않거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거나 사회에 성가신 장애물이 된다고 간주될 경우에 나이가 많은 성인들을 죽일 권리를 가지는가?” 이 질문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계층은 노인층이다. 점증하는 반가족적인 정서, 낙태율, 의술의 발달로 인한 수명연장 등의 이유들 때문에 젊고 강한 자들의 숫자 보다는 늙고 약한 자들의 숫자가 비상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쾌락과 풍요를 추구하는 생활방식을 누릴 권리를 주장한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을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로 인식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안락사라는 용어는 1920년 독일의사 칼 빈딩(Karl Binding)과 알프레드 호헤(Alfred Hoche)가 The Release of the Destruction of Life Devoid of Value(가치를 빼앗긴 생명을 파괴하는 문을 열면서)에서 참아낼 수 없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권리를 가진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합법화시키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도움이나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직접 죽이거나 아니면 환자를 위하여 아무 일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환자를 죽이는 행동”을 의미한다. 쉐퍼는 생명을 연장시키지 못하고 죽어가는 자의 경험을 연장시켜 주는 데서 머무를 뿐인 진료를 중단하고 자연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에 환자를 맡기는 조치, 곧 ‘진료의 중단’과 안락사를 구분한다.

쉐퍼는 안락사를 가능케 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인간의 생명의 가치보다 효율성을 더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임을 지적한다. 노인들, 병약한 자들, 지진아들 정신 지체자들과 같은 자들이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의료혜택을 가로채고 있다는 인식이 안락사를 지지하는 운동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 가장 비근한 예가 나찌정권의 안락사 프로그램이었다. 뉴렘베르크 전범재판에 관여했던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 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나찌 독일의 의학계는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없고 비용만 축내는 만성질환자들, 사회적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인종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인체를 군사 의학적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기획에 협조했는데, 이 같은 독일의학계의 행동을 뒷받침한 것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생명이 존재한다는 인간관이었다. 장애자들과 정신병자들의 치료에 들어갈 돈으로 새로 결혼할 부부에게 투자한다면 많은 집과 결혼자금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방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일도 있었다.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상실된 시대에 아무리 윤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안락사를 실시할 것인가의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한다 하더라도 윤리위원회 회원들이 모두 효율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이상 별다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죽어가는 환자들 자신은 통상적으로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원할 뿐, 안락사를 요구하는 일이 거의 드물다는 사실도 무시되어 버린다. 의사들은 환자를 죽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안락사지지운동에 매달리기도 한다.

 

나가는 말

이상에서 소개한 쉐퍼의 생애와 생명윤리사상은 생명의 시작점과 생명의 끝의 시점에서 제기되는 생명윤리문제들에 대한 근원적인 해법은 모든 왜곡된 의료 관행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관을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평안과 풍요함에 걸림돌이 되거나 사회에 짐이 되거나 경제적 부담이 되는 것은 배척하고자 하는 효율주의적인 혹은 경제주의적인 인간관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 인간관에 대응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생명은 태어난 생명이든 태안에 있는 생명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갈색 인종이든 황색 인종이든 모두 존엄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우리는 경제학이나 효율성의 도표를 우선시해서는 안 되고 인간은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임을 유념해야 한다. 사람은 기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인을 자행하는 유물론적인 로봇들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비인격의 시대를 겨냥하여 인간이 되라는 도전장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든, 아니면 손상된 모습을 지니고 있든 –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잘못된 관행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응은 단순한 비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실현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미혼모들과 낙태를 고려하고 있는 기혼모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단지 “낙태시켜서는 안 된다”라고만 말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행태다. 미혼모들이 머무를 수 있는 거처가 있어야 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가질 수 없어서 입양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많은 부부들을 소개해 주어야 한다. 미혼모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경우에 아이를 돌보는 방법에 관한 조언도 해주어야 한다.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미혼모들이 이용할 수 있는 쾌적한 시설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낙태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정신적이고 재정적인 도움들을 제공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낙태의 유혹을 받는 기혼모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도움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태어날 아이 엄마가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 아이를 돌보는 일을 교회가 도울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하여 교회가 “공동체”임을 보여줄 수 있다. 교회가 보육센터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고, 교회의 신도들이 아이들을 가정으로 데려다가 매주 일정한 시간동안 돌보다 줄 수도 있다. 성경의 진리를 붙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행해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사람들의 물리적인 필요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같은 원리가 영아살해문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어떤 가족이 장애를 가지 아이를 낳은 후에 이 아이를 버리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에 교회는 이 가족이나 아이에 대한 관심을 거두면 안 된다. 교회는 교회 신도들이 주 중에 장애아 가정을 방문하여 도움으로써 장애아를 돌보는 데 뒤따르는 어려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가 안락사를 반대한다면, 고독하거나 힘이 없는 노인들을 돌보는 짐을 같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들이나 말기질환자들에게도 평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들에게도 가족들이나 기독교공동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특히 말기질환자들에 대해서는 호스피스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호스피스제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1) 고통을 통제하는데 필요한 모든 의학적 지식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2)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시 환자들을 방문하여 책도 읽어 주는 등 환자와 직접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환자들이 홀로 내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가 자각해야 한다.

(3)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과정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도록 돕는 제도임을 환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죽음이 비정상적인 것이며, 미래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와 같은 실천은 자연스럽고 바른 행동일 수밖에 없다.(끝)

 

미주

1)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09.

2)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10.

3) Martha Wiling, Beyond Conception: Out Children’s Children (Ipswich: Gambit, 1971), 174.

4)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20.

5)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22.

6)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23.

7)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31.

8)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33.

9) Loe Alexander, “Medical Science Under Dictatorship,”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4 (July 14, 1973), 39-47.

10) 이 부분은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 (서울: 살림, 2010), 132-35를 토대로 재 서술한 것이다.

11) Schaeffer, Whatever Happened to the Human Race?, 3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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