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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 탄생부터 대한민국 건국까지

기사승인 2020.01.10  00: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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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6·25 전쟁 70주년 기념 코닷 기획기사(2)

초기 교육과 개혁활동

이승만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된 1857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서 신분상 왕족이었지만, 집안에 7대조 이래 벼슬한 인물이 없었기에 가세가 어려웠다. 그는 만 2세 때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 근처에서 과거급제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의 시책 중 하나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듬해 4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영어와 신학문을 익혔다. 이때 그는 서재필 박사의 강의를 들으며 미국 문명과 민주주의 정치사상 및 제도에 매료되었다. 이승만은 1896년 여름에 거행된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800명의 국내외 내빈들 앞에서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Koera)’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함으로써 온 장안이 주목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꿈을 가졌다.

배재학당 졸업 이후 이승만은 『매일신문』창간을 통해 자유, 평등, 민권, 국권 등 근대적 정치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만민 공동회의 가두 연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고종황제의 퇴위와 내각 중심의 입헌군주제 정치를 실현하려는 급진 개혁파 일당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1899년 1월 경무청에 구금되었고, 종신형을 언도받아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그는 고종의 특사 조치로 5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언제 사형선고가 내려질지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서 이승만은 감옥에서 기독교에 입신했다. 옥중에서 성경반을 조직하고 기독교 전도에 열을 올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첫 외교와 미국 유학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논문 : 1912년 프린스턴대 출판부>

이승만은 러일 전쟁이 진행되던 1904년 8월에 한성 감옥에서 석방된 후, 그해 11월 고종황제 측근의 친미파 관료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아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역할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미국이 조선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1882)에 의거하여 대한제국이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그해 7월 27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바 있어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은 미국 동부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및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끝냈는데, 이때 국제법 및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길렀고. 그의 평생 중요한 배경이자, 상대가 되는 미국의 문화를 익혀나갔다.

 

독립운동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중앙회(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정한경을 파리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은 국제무대에서 한민족의 독립열망을 대변할 정치·외교가로 부상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3일에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 한국을 새로 창설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이승만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상해와 북경에 있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승만을 비판하는 빌미가 되었다(특히,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3월 10일에서야 들은 이승만은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된 데 이어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이승만은 그해 6월 14일부터 ‘대한 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을 자칭하면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정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상해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그의 신망이 크게 떨어졌다.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내각은 붕괴하고, 김규식·여운형 등 52명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노동자회의에 참석하여 소련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안창호·박은식 등은 북경과 만주에 있는 반(反)이승만 인사들과 합세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논의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5년 3월 안창호 계열의 서북파와 최창식·여운형 등 상해파 고려 공산당이 주도하여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단행하는 동시에 구미위원부에 대한 폐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외교·선전 활동

하지만 1931년 9월에 개시된 일본의 만주침략은 이승만에게 좋은 탈출구가 되었다. 그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에서 고조된 반일감정을 한층 더 조장하고 1933년 2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최 예정인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하여 외교·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일본을 규탄하는 보고서인 「리튼보고서」가 채택되도록 기여했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그는 국제정세를 살피면서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을 예감하고, 1941년에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출반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세계 정복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미국에게 도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의 예고대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사건이 터지면서 미국 조야에서 이승만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갔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특히 1942년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워싱턴 D.C의 한 호텔에서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가 미국 전역에 실황 중계됨으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5년 4월 25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단장으로 모습을 나타내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각국이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해방 후의 귀국

이승만은 1945년 8월 14일 밤 11시(미국시간) 워싱턴의 자택에서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조국이 민족주의자와 공산당의 갈등으로 인해 갈라지게 될 것을 우려하며 귀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미국 국무성은 이승만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귀국 여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한 개인적 자격자’로 귀국길에 올랐고, 10월 1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조국에 돌아왔지만,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점령한 상태를 보게 되었고,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은 분파를 이루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여운형은 8월 15일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형성하였는가 하면, 박헌영이 재건한 공산당은 9월 16일에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의 송진우·김성수 등은 9월 16일에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한반도의 운명이 미·소 양국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나름대로의 국가 건설 작업을 추진했다. 이를 총 5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1단계로 정치세력 통합을 시도했다.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날 10월 17일에 기자회견과 라디오 방송 연설을 통해 민족의 대동단결과 자주독립, 새로운 국가 건설을 역설했다. 그 후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한민당, 공산당, 국민당 등 65개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 2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상과 감정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로 뭉칠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정치세력의 통합노력은 공산당을 위시한 좌익 및 중간파 정당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더 진전되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은 공산당이 자기에게 준 주석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공단상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이에 맞서 공산당 또한 이승만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공산당뿐만 아니라 여운형의 인민당과 안재홍의 국민당 역시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이탈해 나갔다.

두 번째 단계는 반탁운동의 전개로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협정이 국내에 보도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힘을 합쳐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이승만은 영남과 호남지역을 순행하면서 지방에서 반탁운동의 피치를 올렸는데, 이때 그는 남한의 실정을 파악함과 동시에 웅변술을 활용하여 남한국민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 명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우익세력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확장하여 좌익세력을 압도하기도 했다. 미군정과 대결을 불사하고자 했던 김구와는 달리 미군정과는 물리적 마찰을 가급적 피하고 협조하는 태도를 보인 이승만은 건국을 위한 준비로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미군정의지지, 강력한 대중조직, 정치자금 확보를 해나가면서 우익 진영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세 번째 단계는 남한 단정 수립 운동과 방미 외교이다. 1946년 6월 3일 남쪽 지역 순행의 일환으로 정읍에 들렸을 때,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는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와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도리 것이다.”라는 내용의 남한자율정부 수립론을 제기하였다. 왜냐하면, 38선 이북에서는 이미 1946년 2월에 단독정권이 수립이 되어 ‘민주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급진적 개혁작업이 추진되었기 때문이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기 때문에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군정은 이승만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하여금 좌우합작운동을 벌이게 하였고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중도 세력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외교전을 펼쳤다. 이승만은 언론매체들을 상대로 미 국무성을 비난하고,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함을 역설하였는데, 그 결과 미국 정계 및 언론계에서 한국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정책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트루먼 대통령은 3월 12일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의 대소련 정책을 강경·봉쇄 정책으로 전환하는 역사적인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rine)을 발표하였고, 이승만은 이를 강력히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4단계는 남한 총선의 관철로, 귀국한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도 김구와는 별도로 총선거를 통한 남한 정부 수립 운동을 독자적으로 펼쳤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이후 본격화된 미소 냉전의 배경으로 인하여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총회에 회부하였고, 11월 14일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나, 북한 측은 유엔위원단의 북한 방문 요청을 거절하였다. 유엔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고, 그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 및 김규식과 같은 중도 및 좌익세력은 선거에 불참하였고,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좌익세력은 격렬한 선거방해 및 폭력투쟁을 전개해 나갔지만, 남한에서 선거가 진행되었고,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이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개원사진-출처: 이승만기념관>

마지막 5단계는 헌법제정과 대한민국 수립이다. 5·10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5월 31일에 국회 개원식을 가졌다. 이 개원식에서 이승만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고, 새로 탄생하는 정부가 1919년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강조했다. 국회는 개원식에 이어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했고,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으나 결국은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 형태가 관철되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 국회는 단원제, 그리고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의 실시를 기약하는 헌법이 7월 17일 국회에서 통과·선포되었고,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된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그는 광복군 지도자였던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하는 초대내각을 구성하고, 해방 3주년이 되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살펴보았고, 다음번 기획기사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나가되, 과(過)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간략한 언급으로 넘어가고 공(功)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계속).

※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는 유영익, “이승만, 건국대통령”, 「한국사 시민강좌」 43 (2008)를 요약 정리했다.

 

정성호 peripate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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