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의 현재 국면

신요한(새언약교회 전도사)

한일 양국이 지난 12월 16일 도쿄에서 열린 제7차 수출관리정책 대화와 지난 12월 24일에 중국 청두에서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대화의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최근 이뤄진 두 번의 대화에서 한일 양국은 입장 차만 확인한 채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우리 측은 수출규제의 회복을 촉구했으나 아베 총리는 최근 TV아사히 인터뷰를 통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고 이 점을 한일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충분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즉 강제동원 판결이 철회되지 않으면 현재 한일갈등의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회색전망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재개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만간 제8차 수출관리정책 대화를 앞둔 지금 양국의 대화에 임하는 태도와 전략이 중요한 시점이다.

 

한일 양국의 정치적 상황이 외교에 개입되지 말아야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21세기의 더욱 발전된 파트너십을 도모하고 결의하는 취지로 일본에서 회담하고 공동결의를 선언했다. 오부치 총리는 당시 결의문을 통해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밝히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비극적인 역사라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일본이 사죄했지만, 훗날 일본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망언’이 나올 수 있는데 그때마다 일일이 대응하지 말자고 권고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망언이 일본 국내의 문제로 그쳐야지 그것이 양국관계를 훼손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오부치 총리도 미래에 일본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망언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전해졌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는 한국 국민들은 보다 성숙하고 유연하게 한일관계를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일본 정치인들도 발언에 조심스러워지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발판 삼아 같은 해 11월 독도 수역을 한일 공동수역으로 합의하는 등 일본과 우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일본에게 독도를 침탈할 빌미를 제공한다는 등의 국내 여론의 비난이 매우 거셌다.

결국, 이후의 한일관계는 악화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독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며 독도에 여러 시설들을 건설하고 주민을 입주시키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넘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속속 이슈화가 되며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증폭시켰고 이 악순환의 고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에도 끊이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독도를 직접 방문하여 독도 수호의 결의를 다졌고 박근혜 대통령은 ‘천안문 망루외교’로 친중 외교까지 선보여 일본을 또 한 번 자극시켰다. 이를 무마하기 위한 것인지 박근혜 정부는 이후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 종결을 약속하였지만 국내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고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아베 총리와의 첫 통화에서 위안부 합의는 국민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전했다. 국내 정서를 외교의 문제로 끌고 오며 또 다시 일본을 자극한 것이다. 이후 일본도 정치인들의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이 잦아졌고 여기에 또다시 반일감정이 증폭되는 찰나 강제동원 판결과 수출규제로 한일관계는 파국을 치닫게 되었다.

 

‘옳게 보이려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이웃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는 한 율법교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30절 이하에서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유대인의 이웃이 절대 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사마리아인의 역설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친히 알려주셨다. 사마리아인 또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 본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초점을 맞추어 교훈을 도출하는데 이에 앞서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나오기까지의 경위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비유는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즉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하는 왜곡된 종교∙사회∙역사∙윤리적 풍습을 ‘옳게’ 여겼던, 평신도도 아닌 율법 전문가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율법교사가 범한 윤리관이 ‘현실주의’[1] 윤리관이다.

오늘날 라인홀드 니버로 대표되는 현실주의 윤리관은 개인의 도덕(종교적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니버는 솔직한 이원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2] 이러한 현실주의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일종의 ‘종말론적 허무주의’에서 비롯되며 그리스도인의 윤리 또한 오직 현실에 입각한 정의의 효용성이 기준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적 가치관은 이데아에 머물 뿐 더이상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갈 원동력이 필요 없게 된다. 반일감정이 이와 같다.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했던 율법교사와 같이 우리는 ‘역사교사’를 자처하며 일본을 사마리아인으로 여겨 적대시한다. 일본과는 성경적인 가치를 공유할 수 없으므로 현실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성과 속을 이원화하여 보지 않았다. 칼빈은 세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고백하는 신자의 삶을 가르친다. 환언하면 칼빈은 현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보는 신정론적인 윤리관을 제시했다.[3]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직접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복음의 능력에 힘입어 ‘실천’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작금의 한일 외교에 있어서도 성경적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상호호혜적인 태도

먼저 한일 양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확인했다면 각국의 이데올로기적 정서와 역사적·정치적 입장을 ‘옳게 보이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자비를 베푸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특히 이것은 상기(上記)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에서 잘 드러났는데, 자연법의 기초인 ‘황금률’이 표현되는 마 7:12절과 눅 6:31절에 의해 지지를 받으며, 외교의 기본 원리인 ‘상호주의’와도 상응하며, 법학에서는 상호호혜성의 원리, 즉 탈리온(Talion)[4]과도 상응한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선 잘잘못을 떠나 강제동원 판결과 수출규제에 대한 양국의 강경한 입장을 조건 없이 포기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국 모두 국내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강경한 입장은 자제할 수는 있어도 본래의 입장 자체를 전적으로 철회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점을 양국이 먼저 이해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따라서 상호호혜적인 태도를 갖고 지속적인 국장급 이상의 대화를 통해 양국이 수용할만한 적절한 합의점을 도모해야 한다. 나아가 양국은 역사인식과 정치적 이슈를 외교·안보의 문제로 끌고 와서는 안 된다. 외교적 명분이 없이 역사적, 정치적인 이유로 국민과 국제안보질서에 악영향을 입히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이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직언과 같이 국내 문제에서 그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국의 관계 개선의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난 한일 정상회담에서 큰 성과 없이 각자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으나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한 것만으로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렘 31:34)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는 필자의 선천적 요소는 한일 양국을 토종 한국인보다 균등하게 보려는 관점에 경험적으로 기여하였다. 필자의 친부모는 필자가 태어날 당시에 극에 달았던 일본의 혐한감정이 염려되어 한국에서 필자를 낳으셨으나 한국에서 학창시절 내내 반일감정에 매몰된 조롱과 원망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필자의 친조부모는 일제시대에 한반도에서 철도사업을 하신 분들로 친일파 청산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필자는 한일 양국의 장단점을 지식 이전에 삶으로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양국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직접적인 문제의식 또한 갖고 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국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측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측면, 마지막으로 외교의 측면에서 다루어 보았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결정해야 한다. 1965년 이래에 국제 정세를 바탕으로 이어져 오던 한일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지, 아니면 미워도 화해와 용서를 통해 다시 한번 손을 맞잡을 것인지. 그러나 한일 양국은 화해를 통해 이미 공통의 이념을 확인한 관계로서[5] 경제, 외교, 안보,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이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또한, 우리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가르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를 바로 세우는 데도 바쁜 지금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용서하고 품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하고 성령으로 반일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또한, 양국의 교회가 본이 되어 스스로를 항상 반성하며 현실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한일관계에서도 성경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칼빈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미주

[1] 현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으로 회귀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자의 자리를 지켰지만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한 이원론적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성과 속, 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이원론은 지상사회에서 평화와 정의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도출되었다. 이것을 근현대적인 방식으로 제안한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이다.

[2] 라인홀드 니버, 이한우 역,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5판; 문예출판사, 2019), 363-386.

[3]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559), III.7.10.

[4]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한다는 보복의 법칙.

[5] 1984년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은 히로히토 천황의 만찬사의 답사를 통해 자유, 민주, 평화, 번영이라는 공통의 이념을 확인했다. 이날 히로히토 천황은 만찬사를 통해서 “금세기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천황이 우리나라에 대해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과오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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