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안일함이라는 ‘자기우상’에 빠진 시대

기사승인 2019.12.31  07:20:43

공유
default_news_ad2

기독교 신앙의 두 방향

노승주 전도사(리폼드미니스트리 대표)

기독교의 신앙은 크게 논하자면 두 방향으로 향하는 신앙이라고 논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는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크게 두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 첫 주제를 다루는 1~4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하여, 5-10계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고로 기독교의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 정신이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정신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과 실천은 인간의 노력과 훈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된 이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창세 전 작정하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엡 2:8).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제외한 타종교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인본주의적 종교라면, 기독교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사회적, 문화적, 감정적 요소를 신앙에 대입하여 상황에 따라 바뀌는 유동적인 진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며 이미 주어진 옛것,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의 계시, 성경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계시 의존적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변하지 않은 채 존재하며 실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며 구원 받은 자들에게 성령의 사역 가운데 이루어지는 당연한 삶의 변화이다. 이처럼 신앙은 모든 삶의 체계,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위치하는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구원의 결과를 낳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한국교회의 안일함, 안일함이라는 ‘자기우상’

필자는 최근 총신대학교 이상원 교수의 성경적인 창조질서가 바탕이 된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오류가 없는 강의에 대하여 성차별, 성희롱 발언을 주장하는 언론보도와 학생들의 대자보 사태를 통해 그들의 위선 됨과 불신앙에 주목하기보다 안일함이라는 '자기우상'에 빠진 한국교회의 모습을 깊이 새겨보게 되었다1). 반성경적인 사회 운동과 거짓 가르침을 막기 위해 진리로 투쟁하며 앞장 서는 한 교수이자 성도에 대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너무도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보수 교단 교회와 성도들은 동성애가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죄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 일어나는 동성애 운동과 사회의 반성경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않을 뿐더러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많은 성도들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명백한 죄라고 말하지만 차별금지법이라는 겉옷을 입고 우리 삶에 점차 스며드는 동성애 옹호 법안과 정치 이념, 문화, 그릇된 성 윤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래도 아직은 괜찮겠지"를 반복하며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성도들이 나타내는 안일함의 자세에 대해 '자기우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선택 사항이 아닌 ‘의무’가 된 삶이기 때문이다. 즉 삶의 기준이 바뀐 삶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판단과 가치와 기준과 규범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하나님의 뜻에 의존해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인데,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이 보이는 안일함의 자세는 이와 부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편안함과 나태함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 앞서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것을 '우상숭배'로 정의할 수 있다.

성경에 반하는 정책을 펼쳐나가려는 사회와 정치 체제는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죄인 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 흐름에 대하여 무관심 가운데 안일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의무'가 되어 삶의 가장 우선순위가 된 성도에게 있어 합당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고로 성경에 반하는 정책과 이념에 대하여 안일한 자세를 취하는 성도는 지금 당장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바로 세우기를 갈망하지 않는, 그보다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습성이 앞서는 '자기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인 것이다. 지금 당장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인간적 나태함 가운데 회피하는 죄악의 모습이다.

또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사회와 문화에만 무관심하게 안일함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이웃과 진리로 바로 서지 못한 이웃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안일함의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우리 곁에서 자주 보인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계명은 결코 이러한 무책임함을 우리에게 안겨주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은 언제나 성도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바로 서지 못했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마저도 결코 자기보다 앞설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웃에게도, 진리로 바로 서지 못한 이웃에게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안일함의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무관심과 안일함의 깊숙한 내면엔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는 '자기우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랑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지 않는 지나친 '자기우상'을 담고 있다.

십계명의 제9계명이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고 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기에 거짓을 증오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제9계명을 적극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 것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거짓이나 허위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를 부여하신 것이 바로 제9계명의 적극적인 측면이다. 즉 보호해야 할 것이 그의 재산이건 명예이건 간에,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각 사람을 충실히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성도는 이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하여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도 안일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되며 이웃의 평판과 이익을 위해서도 우리의 입을 진실의 통로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무관심함 가운데 사회, 문화, 정치, 이웃 등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는 반성경적인 흐름과 현상, 이념에 대해 안일한 자세로 "그래도 아직은 괜찮겠지"를 외치며 무책임한 태도를 취할 때, 이후 안일함이라는 '자기우상'은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안겨다 줄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교회는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지 못하게 되고, 성도는 진리를 바르게 들을 수 없기에 성도로서 바르게 설 수 없게 되며, 교회는 국가의 간섭 아래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상실해 수없이 많은 핍박과 억압에 처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시기와 같이 많은 이들의 피흘림이 있을 것이며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이 가득할 것이다. 사회는 무질서함 가운데 균형을 잃고 그릇된 윤리관과 정치관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며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힘쓰게 될 것이고, 자라나는 다음세대는 세속적 가치관과 교육에 물든 채 바른 신앙을 갖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는 이러한 다음세대들이 자라나 성경의 권위가 제일 되지 못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배교의 시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 가운데 우리의 교회는 안녕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사회 가운데 우리들은 안녕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사회 가운데 우리의 다음세대는 안녕할 수 있겠는가? 상상하기 싫은 그 날, 그 날이 더욱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언제까지 '자기우상'에 빠져 안일함의 늪을 허우적대고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자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결코 영적 안일함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는 불완전한 세상이며 죄악이 우리를 향해 덮쳐오는 세상이다. 성도는 언제나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세계관의 전제로 삼아 현상과 사회, 모든 영역을 해석하는 분별의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는 명백한 진리의 말씀이다. 계시된 말씀은 성도에게 원수의 존재를 밝히며 그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우는 사자가 어떠한가? 청교도 주석가 매튜 헨리는 우는 사자에 대해서 "우는 사자는 굶주리고, 강하고, 잔인한,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자"라고 설명한다. 영혼을 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아주 사납고 게걸스러운 사냥꾼의 모습으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것이 우는 사자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악의에 찬 노력을 지침이 없이 쉬지도 않고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파멸로 옭아맬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으며 두루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불완전함이며 이를 바로 깨닫고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주어진 시간을 안일함으로 소모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도의 자세를 요구한다. 이 요구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근신하라, 깨어라,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

필자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안일함이라는 '자기우상'에서 빠져나와 마귀의 간계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바르게 깨닫고 분별하여 근신하며 깨어있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자세를 지니길 소망한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우리의 대적 마귀는 언제나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매일의 삶 가운데 잊지 않고 살아가길 요구한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성도가 성도됨의 본질을 잃고 '자기우상'에 빠져 나태하고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마귀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이 땅에 배교를 만들고 그들의 영혼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힘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결코 안일함으로 낭비해선 안 될, 긴박하고도 격정적인 오늘이다. 오늘의 시간을 우리가 믿음으로 지켜내지 못할 때,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의 목적이 되는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악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히 선포하는 증인으로 우리가 살아가길 필자는 간절히 소망한다.

 

미주

1)참고 기사: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75

2)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박건택 역, 『기독교 강요: 2판: 프랑스어 초판』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218.

 
 

노승주 rministry@naver.com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