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일찍이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속 정부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만 있다’고 했다.1)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초자연적 지식이 어둡지 않게 비치는 곳”이라 했다.2)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정치는 일반계시(자연을 통해 계시된 법칙)의 영역 안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로 대표되는 교회는 특별계시(성경)의 영역까지 지식의 빛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카이퍼는 세속 정부가 비록 종교의 영역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 그리고 이 모든 통치의 섭리는 정의(正義)를 갈망하고 부정의(不正義)의 원수라는 것을 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 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정치에서 제거하려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섞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고 한 말씀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종교개혁 이후의 정치는 지금까지 이 싸움의 연속 선상에 있다. 개혁자들은 어찌하든지 세상 속의 빛이 되기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는 과거 중세 로마 가톨릭이 교회의 영역만 거룩하고 교회 밖은 속되다고 본 철학적 관점에 대한 개혁이었다. 그 때문에 개혁자들은 세속에서 떨어져 독야청청(獨也靑靑)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세속과 접촉하여 세속을 거룩하게 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부정한 자를 만져서 치료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던 것과 같다. 이것이 세상 속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일반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도록 도와야 한다. 일반계시를 종교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특별 계 시화 하는 것이다. 특별 계 시화 한다는 말은 카이퍼의 말처럼 “기독교 국가를 부활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기독교 원리가 지배하는 국가가 되게 하는 개념이다.3) 복음은 중세 가톨릭처럼 신정통치시대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복음의 원리가 가정을 비롯한 사적인 모든 영역을 비롯하여 국가 정치의 영역까지 누룩처럼 침투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데 있다.

섭리 교리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며 보존하시는 방식을 뜻한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1문은 섭리를 ‘보존’과 ‘통치’로 요약한다. 여기서 사람의 정치적 활동은 하나님의 ‘섭리 대행자’의 역할로 이해한다.4)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은 특별계시를 통해 일반계시를 바르게 해석하여 국가를 성화시킨다. 이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나님께서 각종 짐승들과 새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을 때,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름을 지어준 사역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정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섭리 대행자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영미의 보수 정치가들은 이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섭리교리에 대한 개혁파적 이해로 말미암아 에드먼드 버크 같은 걸출한 보수 정치가는 “국가는 신의 섭리가 만들어난 창조물”이라고 규정했다.5) 뿐만 아니라 예정론의 관점에서 “비록 대개는 불가사의한 방식이지만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믿음”까지 고백했다.6) 버크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법에 대한 인식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간이 법을 만들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법률들을 비준하거나 왜곡할 뿐”이라고 했다.7) 이런 버크의 관점은 특별계시를 통해 일반계시를 해석해야 한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기서 “보수주의”라는 개념은 섭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보수주의는 단순히 자기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수구’가 아니다.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철학이 헤아리거나 납득하지 못할 위대한 힘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진정한 정치는 영혼의 공동체에서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기술”이라고 했다.8)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n)은 “새롭고 아직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 낡고 여러 번 해본 그 무엇을 고수하는 게 보수주의”라고 했다.9) 따라서 버크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우연이나 운명처럼 보이는 이 과정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운행되는 양극단의 도덕률이라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고로 보수정치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지난 세기 선조들의 지혜 앞에서의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겸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지혜로 통치하시고 보존하신 섭리를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놀랍게도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 정치관, 즉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선동가를 부추기거나 사기꾼을 배불리고, 전제군주에 항복하는 일밖에는 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는 오늘날 보수진영이나 좌익 진영을 가리지 않고 선동하는 정치꾼들에 놀아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 진보진영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대조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히 무시한다. 검증되지 않는 실험정신을 내세우며 새로운 시도가 행복을 가져다 둘 것이라고 선동한다. 또한, 섭리의 자리에 우연과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부여한다.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고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10) 뿐만 아니라 “사회 복지를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조상들의 지혜를 신뢰하기보다는 이성과 충동, 물질적 결정론”을 신뢰하도록 독려한다.11) 여기엔 무신론과 진화론, 해체주의, 공리주의 사고가 저변에 숨어 있다.

이들은 세상의 보존과 통치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계약과 조직적 통치에 의해 가능하다고 본다. 영미의 보수주의자들이 국가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보았던 입장과 반대로, 국가가 인간의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장 자크 루소는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하신 가정까지도 “정치사회의 최초 모델”로 볼 정도였다.12)

이와 아울러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를 주목해야 한다. 벤담에게 사회적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었다. 어찌 보면 달콤한 표현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은 무시될 수 있다는 인민민주의의 또 다른 가면에 불과했다. 때문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어리석은 곳이 마르크시즘”이라고 했다.13) 벤담의 공리주의는 공산주의 사상에 영감을 주었다는 말이다.

물론 보수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수주의는 가진 자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런 태도는 공산주의 독재에서 더 흔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면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다수의 행복이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버크는 “가장 큰 행복은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할 때, 즉 경건함과 의무, 지속적인 사랑에서 파생한다”고 했다.14) 반면에 벤담은 창조주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게 종교란 단지 도덕률의 틀에 불과했다.15) 진화론과 마르크시즘은 하나님의 섭리가 서야 할 자리에 ‘우연’과 ‘인간의 이성적 통치’를 세워 넣었기 때문이다.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섭리에 대한 차이가 무엇인가? 보수주의 정치는 인간이 하나님 섭리의 대행자로 자각한다. 그러나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정치에서 하나님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연과 진화, 그리고 인간 이성의 힘으로 건설하는 바벨탑을 꿈꾼다.

한국의 보수정치를 생각해 보자. 결코, 보수주의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가? 보수를 비기독교인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수구(守舊)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아니다. 성경적인 보수정치는 법치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보존과 통치) 대행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치와 보수주의를 뗄 수 없다.

미주

1) 아브라함 카이퍼,「정치 강령」, 손기화 역,(새물결플러스,2008),p.124.

2) Ibid.

3) Ibid.

4) R.C.스프로울,「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제1권」,(부흥과개혁사,2012),p.204.

5)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재학 역,(지식노마드,2018),P.105.

6) Ibid.,p.106.

7) Ibid.,p.126.

8) Ibid.,p.65.

9) Ibid.,p.64.

10) Ibid.,p.67.

11) Ibid.

12) 장 자크 루소,「사회계약론」,김중현 역,(팽귄클래식코리아,2015),P.35.

13) 러셀 커크, op.cit.,p.227.

14) Ibid.

15)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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