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해법도 성경에서 찾아야

신요한(새언약교회 전도사)

한일 갈등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에도 외교적으로나, 국민적으로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이 일본에게 피해를 받았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동남아 국가들은 그 국민들이 일본에 대해 대부분 호의적이라는 조사결과가 있다.1) 중국과 북한, 한국만 일본에게 부정적이다. 특이한 점은 한국만 유일하게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은 북한, 중국과 달리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도 일본과 여전히 갈등 관계를 지속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를 해결할 열쇠는 무엇일까? 일본의 수상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고,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수백만 불씩 배상받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을 모두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면 정말 문제의 본질이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우리 안에 내재된 ‘반일감정’을 다루지 않고서는 갈등의 본질을 해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보인다.

 

교육이 문제의 원인, 그러나 삶의 경험으로 극복 가능

약 3개월 전, 유튜브 채널 ‘주권방송’에서 ‘자유한국당 해체 동요’와 ‘자유한국당 해체 숫자송’이라는 제목의 영상들, 흔히 ‘자한당 해체송’이라고 불리는 영상들이 항간을 뜨겁게 달궜었다. 아직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켜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도 이러한 교육에서 자유로운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받지 않았는가? 우리는 특정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가?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특정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가?

필자가 초등학생 때에도 학교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독도는 우리 땅’과 같은 반일(反日)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동요를 학생들에게 부르게 했다. 객관적인 접근이 없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어린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받은 교육도 ‘자한당 해체송’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은 자라면서 통일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통일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면서 직접 경험하는 현실(이질감, 군사도발, 통일세 등)로 인해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와 달리 반일감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대부분 통일에 대한 시각은 공교육을 극복하지만, 반일은 여전히 그렇지 못하는데 대표적인 이유로는 통일에 비해 일본에 대한 경험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사고에는 ‘이성’과 ‘경험’의 조화를 요하는데 ‘경험’의 결함이 치명적이다. 경험은 ‘인식’을 전제하는데 우리 대부분은 ‘한국에 의해 전해진 일본’만 인식해 왔다. 즉 한국의 민족주의적인 사관(史觀)에 의해 해석되어진 일본을 주로 인식해 왔다. 한국 언론의 보도에서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는 찾기 어렵다. 더불어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없거나 일본 문화와 관습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반일민족주의적인 공교육이 여전히 유효하다. 그나마 활동하는 이성은 심지어 감정적인 반일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이성이다. 더 나아가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일본 현지의 관점, 제3국의 관점, 그리고 다양한 사료들까지도 함께 인식해야 하는데 평범한 시민에게는 현실적으로 접근성이 어렵다. 또한,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에 대한 다른 관점의 자료를 접하는 것에 인색하다. 그것들이 정확하지 않은 정보, 일본에게 유리한 정보를 전달할 것이란 편견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사실에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반일 이데올로기는 한국교회와 무관하지 않다.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모본은 ‘오직 성경’에 입각한 세계관을 이 땅에서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계승해야 할 책임이 있는 한국교회는 이상하게 한일관계에서만큼은 그 대안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일’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반일의 무한히 넓은 외연과 ‘일본을 절대 악으로 여김’이라는 절대적 타자로서의 내포가 중첩되어 있음을 말한다.2) 즉 일본을 아직 ‘절대 악’으로 여기는 감정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를 통해 심화된 한일 갈등은 문화나 일상 속에서 그나마 제어했던 반일감정을 결국 제어하지 못하고 ‘불매운동’ 등으로 다시 일상 밖으로 표출하는 결과를 안기었다. 아직 우리가 일본을 증오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성경적 대안의 시대적 요청

한국교회는 이러한 한일 갈등의 시대적 대안을 요청받고 있다. 담임목사에게 성도들이 불매운동을 해야 하냐고 종종 물어본다. 교회 지도자들은 여기에 올바로 대답하려면 결국 성경을 통해 답해야 한다. 하지만 반일감정에서 벗어나 성경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진단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일본의 이미지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을 회피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무의식에 잠재된 ‘선(先)지식’, 즉 전제는 우리의 신앙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성경해석학자들은 성경해석 주체의 전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에 동의한다. 단지 “어떤 전제가 합법적인가”하는 질문이 남아있을 뿐이다.3) 그러므로 전제는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해 ‘다루어져야’ 한다. 즉 “반일감정은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처럼 ‘반일감정’에 잠식된 의식이 성경에 의해 ‘성경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경해석의 목적이어야 한다. 반일감정에 잠식된 관념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것은 위험하며 이는 다른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상관 주의’라고 하는데, 상관 주의는 튀빙겐 학파에서 발전시킨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으로써 학문의 중립성을 토대로 신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이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중립성을 갖는 것이 ‘학문’이었다면 포스트모던이 도래하면서 중립성의 객체가 ‘이데올로기’로 옮겨지고 있다. 예컨데 마르크시즘에 중립성을 부여하면 신학이 ‘마르크시즘적(的)’으로 변질되어 신학 색깔을 입힌 마르크시즘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신학이 마르크시즘을 비판할 권리를 스스로 저버린다. 이러한 신학이 ‘해방신학’이다.

그렇다면 반일은 어떠한가? 아무리 성경 지식에 탁월해도 반일을 비판할 권리를 스스로 저버린다. 성경은 모든 것을 쪼갤 능력과 권위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대부분 좌우, 진보와 보수 가릴 것 없이 반일만큼은 예외다.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공산국가도 아니고, 일본에 살아본 적도, 일제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는데 좀처럼 반일감정은 쪼개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저버린다.

반면 ‘반공’(反共)은 많은 이들이 쪼개려 한다. “예수를 반공이라는 이름 위에 올려놓는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앙과 결부시킨다” 등의 비판은 좌성향 기독교 군집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현재도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며 필연적으로 교회를 탄압하는 반(反)기독교적 사조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음에도 이러한 활동은 활발하다.4)

물론 성경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자본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이 자본주의를 택하는 이유는 도덕적으로 특별히 우월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주는 혜택이 현재로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성경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일에 현재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듯이 막스 베버를 통해서도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이를 택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결함도 우리는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이를 항상 성경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성경적’(聖經的) 정의

한국 사회에서 ‘반일’은 이미 이데올로기화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달리 반일 이데올로기를 성경적으로 다루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일 양국이 수교를 정상화한 후 반일이 타당한 것이라는 역사적 증명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반일운동이 다른 이들의 권리를 해치는 결과를 우리는 최근에 경험했다. 더군다나 우리는 성경의 진술들이 반일감정을 직접적으로 조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 우리의 반대 대상은 일본 그 자체가 아니라 ‘성경적이지 않은 부당한 것과 교회를 억압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이것이 한일 갈등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일’, ‘항일’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슬로건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속국’임을 자처하는 노예 의지에서 벗어나 성경에 구속되려는 의지로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한일 수교 정상화 이래 반일감정의 정당성은 모든 측면에서 입증된 적이 없다. 이제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반일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듯이 중생된 의식은 계속 중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에 내재된 ‘반일감정’도 중생되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반일이라는 감정에 중립성을 부여하여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거대한 추상적 집단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정신과 어긋나는 일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만 반대해야 한다. 이것을 전제하고 한일간의 대립의 실마리를 ‘오직 성경’으로부터 찾아야 비로소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진정한 한일갈등의 회복이 시작될 것이다.

 

미주

1)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우호도 평균은 약 69%에 달한다. 중국의 일본에 대한 우호도는 8%이며 한국은 22%이다. (출처: Chapter 4: How Asians View Each Other, Pew Research Center, https://www.pewresearch.org/global/2014/07/14/chapter-4-how-asians-view-each-other/)

2)) 전재호, “한국의 반일(反日) 민족주의 연구: 담론의 변화의 특징”, 한국과국제정치(KWP) 35권 2호, 113-147.

3) 게르하르트 마이어, 성경해석학, 송다니엘∙장해경 역, (2판; 영음사, 2015), 56-58.

4) 기독교 언론사 뉴스앤조이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에 선두하고 있다. 다음은 뉴스앤조이에 기고된 칼럼의 일부이다. “우리나라 극우 정치 성향의 세력은 개신교회에 몰려 있습니다. 국정 농단 주범 박근혜의 구명을 위해 시위하는 태극기 부대는 가장 극우적인 정치 집단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극우 개신교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성경처럼 신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수, 그중 개신교 보수주의의 뿌리는 반공 이데올로기입니다” (출처: 최종운, “극우 종교와 극우 정치가 만나면”, 뉴스앤조이, 2019.05.22,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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