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학교 성희롱 발언 논란

노승주 전도사(리폼드미니스트리 대표)

대한민국 개혁신학의 대표 신학교로 불리는 총신대학교(이재서 총장)가 교수들의 성희롱 발언 논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캠퍼스의 곳곳은 대자보로 둘러싸여 있고 학생자치회의 지속적인 해당 교수진 징계 요구로 인해 이 사안은 학교 내부에서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교계와 민간 언론까지 ‘신학교의 부패와 도덕성의 실추’라는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오히려 필자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파헤치며 본 글을 펼쳐나가지 않고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기독교 언론과 학생자치회의 행보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총신대학교 학생자치회에 의해 시행된 전수조사의 결과로 파악된 해당 교수들의 발언이 과연 모두 처벌받아 마땅한 발언이었을까? 필자는 이에 부정한다. 성희롱 발언 전수조사의 결과로 공개된 ‘ㅇ 교수’의 발언은 아래 쓰여진 기사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총신대 일부 학생교내 생명운동/반동성애 인사 악의적 폄훼 (바로가기)

 

무엇을 문제 삼을 것인가?

이후 총신대학교엔 11월 18일 자로 또 다른 대자보가 붙게 되었고 그 대자보의 하단에는 “2019년 11월 18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조직신학 교수 이상원”이라고 적혀 있었음을 통해 ‘ㅇ 교수’는 이상원 교수로 밝혀졌다. 필자는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며 바른 신학에 입각해 오랜 시간 한국 교계에 기독교 윤리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쳐온 이 교수의 발언에 결코 성희롱적 요소와 비도덕적인 발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과연 위와 같은 발언에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 누가 오랜 시간 개혁신학에 수많은 기여를 해온 이 교수의 신학과 그의 발언을 문제 삼을 수 있을지 의아할 뿐이다.

이 교수는 “인간론과 종말론” 강의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설명을 언급했고 이와 같은 설명은 신학 강의의 연장선으로 해당 강의의 추가적인 설명이 될 터인데 위 발언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총신대학교 학생자치회의 입장이다. <뉴스앤조이>의 보도를 따를 때, 학생자치회의 관계자는 “교수들의 발언이 대부분 성 문제와 상관없는 강의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론이 성 문제를 다루고 있음은 저명한 신학자들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개혁신학의, 아니 개혁신학만이 아닌 주류 신학들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이 교수의 강의 시간 중 동성애에 대한 설명은 결코 강의에 무관하지 않으며 강의의 합당한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기독교 언론으로 자신들을 소개하는 <뉴스앤조이>는 이 교수에 대해 “수업 시간 동성애와 여성 성기에 대한 부적절한 이야기를 꺼낸” 교수로 보도하며1) 위 논란은 기독교 언론뿐만이 아니라 일반 언론사까지 순식간에 이슈 거리로 전해졌는데, 이 교수의 발언은 결코 여성 성기에 대한 부적절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그 질서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부정적인 설명을 덧붙여 일반 언론사 또한 이 교수의 발언이 여성 성기에 대한 부정적이고도 과한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한 기독교 언론사 <뉴스앤조이>를 과연 기독교 언론사로 부르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필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바른 신학 없이 바른 신앙의 방향은 갖추어질 수 없는 것이며 바른 신학의 부재 가운데 지속적으로 보도가 이어진다면 그들의 방향성은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방향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매번 기독교의 도덕적인 타락을 문제 삼으며 친동성애적, 즉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기사를 보도하는 <뉴스앤조이>가 보도하는 내용들은 건강한 신학적 방향성을 지니고 보도되고 있을까?

필자가 필자의 이전 칼럼, “기독교인은 대중매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2)를 통해 언급한 바와 같이 <뉴스앤조이>는 지속적으로 동성애, 퀴어신학에 관한 옹호 기사를 보도하는 등 자신들의 확고하지 못하며 건강치 못한 신학적 입장으로 지속적으로 반성경적인 보도를 일삼아 왔음을 밝혔다.

 

신학적 성찰

우리가 오늘날 현 사건을 통해 바라봐야 할 중요한 신학적 성찰은 무엇일까? 필자는 ‘바른 신학의 부재’ 가운데 이루어지는 기독교 언론사의 행보와 학생 운동의 위험성에 대해서 중요하게 다루고자 한다. 위 교수의 발언을 문제 삼는 언론과 학생들의 발언을 들여다 볼 때 이들의 판단 기준은 결코 신학과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과 그릇된 평등의 개념에 기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학생자치회와 일부 언론이 문제 삼고 있는 이 교수와 관련된 발언들은 신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왜 총신대학교와 언론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발언들까지도 문제 삼을 만한 발언들과 묶어 함께 문제 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른 신학의 부재로 인함이다.”

헨리 미터는 “칼빈주의는, 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상 체계”라고 설명했다.3) 즉 신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학문적인 신학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과학, 예술, 도덕, 윤리 등 모든 것에 대한 사상을 포함하는데 이 사상 가운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칭한다. 도덕적인 판단 기준이든, 정치적인 판단 기준이든 기독교 언론과 기독교인이 그것을 바르게 판단하는 유일한 관점과 기준은 오직 성경으로 바르게 기반하는 바른 신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이 단순히 종교만을 개혁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개혁한 것처럼 신학은 성도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하고 그 때에 우린 우리 자신이 지니는 선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합당한 선의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총신대학교 학생자치회와 위 사건을 동조하며 보도하는 기독교 언론사의 이 교수에 대한 발언과 행보를 보게 될 때, 그들에게 바른 신학을 전제한 판단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히려 필자는 묻고 싶다. 어긋난 평등과 윤리, 권위, 젠더의 개념으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 채, 비성경적인 차별금지법안을 입법화하려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곡해하는 언론 기사와 이념으로 가득 찬 선동형 움직임으로 가득찬 오늘날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총신대학교 학생자치회와 학생들,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언론들의 독자들은 무지함으로 그들의 움직임에 동참해 해당 교수를 평가하고 그의 신학까지 판단하고 있진 않은가? 이러한 선동에 숨은 사상이, 배후가 무엇인지, 이를 통해 무너지게 될 개혁신학과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떠할지 생각해보았는가? 반성경적인 사회 움직임과 권위 해체, 제도 붕괴를 위한 선동형 외침에 무지함 가운데 무리에 합류해 동참하진 않았는가? 아니, 사회의 눈초리가 두려워 성경의 가르침을 내세우지 못하고 뒤로 숨어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지 않았는가?

고전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살펴보라. 죄인 된 인간의 본성 가운데 대중은 보이지 않는 임금의 옷에 환호하며 그 누구도 선뜻 임금의 벌거벗음에 대해 지적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 나오는 수많은 대중들처럼 그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때론 지혜로운 것보다는 어리석은 것에, 지식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무지를 좇아가곤 한다.4)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동성애의 죄악 됨을 외쳐야 할 시기에, 남성과 여성의 정확한 성 역할의 성경적 차이를 외쳐야 할 시기에 과연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외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는 몇이나 될지에 대해 이 사건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사건이 비록 개혁신학의 대표적인 신학교, 총신대학교에서 일어났고 많은 학생들이 동요했다 할지라도 그 행보가 옳지 못함을 인지하고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이 두려워 선뜻 나서지는 못하지만 바른 목소리를 내기 원하는 학생들이 존재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성경의 가르침에 합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길 소망한다.

어떤 이들은 신학이 기독교의 분열을 초래한다고 말하지만, 신학은 오히려 기독교를 하나 되게 하는 유일한 통로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역사는 오직 동일한 신앙고백 하에 힘겨운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며 더욱 견고해지고 성장한 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역사이다. 순교자들의 피흘림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견고한 신앙고백, 즉 건강한 신학을 통해서 건강의 신앙의 열매로 맺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좋은 성품과 인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신학교의 본질은 오직 신학이다. 성품과 인격 또한 중요하지만, 본질 되는 신학보다 우선 되진 못하며 우선이 되어서도 안 된다. 총신대학교가 지난 총신 사태로 인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신학 전공자가 아닌 인사들을 기용하고 신학교의 색깔을 많이 버린 채, 복지와 평등을 주장하며 사회 풍토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총신대학교가 현 사회의 풍토를 따라 움직이게 될 때, 점차 오직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신학의 권위와 신학이 전제되는 판단 기준은 무시되고 개인적인 감정과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욱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뒤따르는 결과일 것이다.

 

신학 없는 도덕적 기준의 위험성

필자는 글을 맺으며 신학이 기반 되지 않는 도덕적 기준의 위험성을 전하고 싶다. 죄인 된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자신들의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칼날을 세울 때, 그 시작은 마치 나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에게 칼날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지고 자신은 그러한 도덕적 기준으로부터 자유한 것처럼 여겨지나, 결국 그 칼날의 끝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세운 이상적이고도 높은 도덕적 기준에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또한 충족할 수 없는 것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의 판단 기준을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 기준으로 세워서는 안 되며, 오직 바른 신학을 기반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빗대어 바라봐야 한다. 필자는 묻고 싶다. 신학이 없는 기독교 언론과 학생 운동, 이대로 괜찮은가?

미주

1)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5773

2)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81

3)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박윤선·김진홍 역, 『칼빈주의 기본 사상』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59), 22.

4) Michael Scott Horton, Made in America : the shaping of modern American evangelicalism, 김재영 역,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서울: 나침반, 200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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