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종교개혁은 구원을 확증하는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이방종교들은 구원의 확실성을 자신의 행위(공로)에서 찾았다. 신께 대한 종교적 봉사가 구원을 받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종교적 복종과 희생과 금욕은 구원을 확신하게 하는 증거라고 보았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구원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 행위에 최대한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심하면 가정과 일상의 삶까지도 포기하고 종교적 행위만 견지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사이비 이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개혁자들은 이러한 이방종교적 구원의 확신을 개혁하여 성경적 구별을 회복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중세 로마 가톨릭 안에서 명확한 구원의 확실성을 위해 금욕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가 종교행위에만 집중했다. 금욕을 하고, 미사와 고해와 자선을 통해서 구원을 확신하려 했다. 루터도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런 방식으로 구원을 확신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세상에 대한 신자의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게 했다. 그 결과 정치, 경제, 사회의 영역은 마귀의 통치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사고를 갖게 만든 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큰 몫을 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 개혁자들은 구원의 확실성을 종교의 영역에서만 찾는 철학적 접근방식에 저항 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를 외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확실성을 재발견하여 설파했다. 마틴 루터로부터 점화된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는 구원과 구원의 확신을 신자의 행위에서 찾지 않고 예수님의 의(공로)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가르침을 개혁된 교회들이 또다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구원의 확실성을 그리스도의 의(공로)에서만 찾기 때문에, 신자는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확신은 오로지 행위를 배제한 믿음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율법주의(無律法主義)를 주장한다.

물론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행위(공로)에서만 찾아야 한다.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다. 그러나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외친 구원의 확신은 행위를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믿음이 행위(열매)로 나타날 때 비로소 확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조지 휫필드도 “나는 여러분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회심을 믿지 않는다”고 서슴지 않고 외쳤다. 여기서 구원의 확실성을 주는 신자의 행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곤 한다. 이 행위를 공로주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행위는 신자의 행위가 아니다. 존 머레이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관계”를 말한다.1) 신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눅 18:27)는 행위다.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은 자기의 공로로 의로워지려는 부자청년을 향한 주님의 지적이었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예수님의 이 선언 후에(눅 18장) 삭개오의 초인적인 신앙고백(눅 19:8)을 연이어 기록한다. 삭개오의 행위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작용하심이 신자의 행위 속에 드러날 때,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인 “구원의 확실성”에 도달한다.2) 따라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작용하심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구원을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작용하심에서 찾는다는 가르침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조직신학에서는 이것을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라고 한다. ‘신비적 연합’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분의 전가(칭의) 정도로만 이해한다. 이 위대한 교리를 이 정도로만 이해하고 멈추면 피상화(皮相化) 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 자기 확신인지, 아니면 종교적 세뇌인지 점검 할 길이 없다. 이것을 점검하는 것이 바로 ‘열매’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변화다. 이것을 존 머레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연합이란 또한 사귐을 의미하는데, 사귐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고 경건하게 만들어 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과 동행하게 만들어 준다.”3)

막스 베버에 의한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이런 교리를 배경에 두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막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와 전통적인 자본주의(천민자본주의)를 구별한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전통적인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런 개혁주의 교리를 탑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버가 주장하는 근대 자본주의는 신자의 구원 확실성을 세속에서의 활동을 통해 찾았다.4)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질 수 없다(마 6:24)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에 실천함을 통해서 자신이 신비적 연합 안에 있는지 점검했다. 이것을 베버는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프랑크의 말을 인용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일생동안 수도사가 되어야 하는 새로운 영적 상황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했다.5) 왜냐하면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금욕적으로 근검하고 절약하며 성실과 정직으로 재물을 모으는 것을 통해 구원의 확실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택함 받은 자임을 보여주는 증표로서의 선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6) 여기서 선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한다.7) 이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추구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이 경건한 경제 활동을 통해 얻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심 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령께서 사도행전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기적을 자본주의 안에서 이렇게 이루신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거나 기부하는 문화는 여기서 나왔다. 결코 사회주의 원리에서는 기대 할 수 없는 정신이다. 이런 태도는 자연히 전통적자본주의(천민자본주의)가 부의 축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태도와 구별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바르게 정립하려면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교리부터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파 전통의 ‘확신교리’를 회복해야 보수적인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부의 축적이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과정 속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신앙적 안목이 회복돼야 한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교리가 바르게 정립된 교회가 늘어나면 천민자본주의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 교회에서 영접기도로 구원을 확신케 하거나, 자기 확신을 세뇌시키거나, 혹은 종교적 행위(자기 의) 속에서 구원을 확신케 하는 일을 개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혐오하는 자본주의 병폐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개혁파의 바른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생명 걸고 실천하는 데 있다.

 

미주

1) 존 머레이,「구속론」,하문호 역,(1994,성광문화사),p.197.

2)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문제 역,(현대지성, 2018),p.205.

3) 존 머레이,op.cit.,p.226.

4) 막스 베버,op.cit.,p.202.

5) Ibid.,p.223.

6) Ibid.,p.206.

7) Ibid.,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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