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기독교는 전제로 형성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전제주의’(前提主義)라고 한다. 전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다른 모든 논리에 오류가 따라온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주장한다. 문장으로만 본다면 이 주장은 ‘참’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 동성애를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불륜을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혹은 자녀를 위해 매를 드는 것을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이 문제는 사랑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전제주의다. 이 전제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독교 발언을 한다고 해도 기독교적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1895-1987)도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질문이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선행한다”1)고 했는데, 이는 정말로 타당하다.

“시장경제”와 관련하여 이 문제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시장경제”를 어떤 전제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에 손을 들어주거나, 혹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손을 들어주게도 된다.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기독교 교리)을 전제로 이 두 사상을 바라본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이 두 가지 경제 원리를 비교해 보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도행전 2장에서 자기의 것을 다 팔아 서로 공평하게 나누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 그리고 계급 간의 갈등을 가져온다고 보인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철학적 구조만으로 ‘막연히’ 바라보면 그렇게 보인다. 또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그런 모습이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러나 두 경제 원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계급과 부의 격차, 그리고 빈곤의 확대가 역사적으로 더 심하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직간접적으로 적대적인 스텐스를 취한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는 만성적인 빈곤이 극복되고, 계급 간의 갈등이 점차 해소되고 있다. 비록 빈부의 격차는 심한 경향을 보이지만 가난한 자의 삶의 질은 공산사회의 평균 삶의 질보다 월등하다. 무엇보다 근대자본주의 사회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고 친 기독교적이다. 아니 기독교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더 성경적이라면 왜 이런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거기에는 인간을 이해하는 전제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회주의 자본론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유물론적’이다. 유물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간의 타락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자동적으로 ‘인간의 신격화’2)라는 급진주의로 나타난다.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고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사회 개량론(Meliorism)”3)을 주장한다. 부(富)의 분배는 하나님(성령님)이 하지 않고 인간 정부가 한다. 여기서 큰 정부론(big government theory)이 나온다. 정부가 ‘하나님 노릇한다’는 말이다. 정부의 하나님 노릇을 통해 보편적 평등을 추구한다. 이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는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고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유토피아를 건설을 꿈꾼다. 이 신념은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여기서 혁명의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것을 칼 마르크스는 모순이 피의 혁명을 낳는 ‘자연의 당연한 원리’라고 합리화했다.4) 이것은 분명히 사도행전 10장의 유무상통과는 거리가 멀다.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반면에 막스 베버에 주창된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바라본다. 그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돈 욕심”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경제를 바라본다.5) 그뿐만 아니라 베버는 인간이 부지런하게 사는 것보다는 편안함을 더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직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성과급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도록 독려하더라도 편리함(게으름)을 더 추구한다고 한다.6) 사람이란 “적게 일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7)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면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사회를 번영하게 할 의지가 없다. 베버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신앙교육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앙 교육으로 노동 자체를 “소명”으로 여기게 될 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8)

흥미롭게도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동감”(sympathy)을 연결했다. 동감은 인간이 부(富)를 축적하려는 타락한 본성보다 더 강력한 ‘쾌락’이다. 이는 마치 막스 베버가 ‘부의 독점’에 대한 타락한 본성보다 ‘적게 일하는’ 쾌락의 열망과 흡사하다. 아담 스미스는 이것을 ‘상호적 동감의 쾌락’이라고 부른다.9) 이 상호 동감의 쾌락에 대한 열망은 자본주의에서 부의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가 된다.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누고 이웃이 그것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자기의 행복처럼 ‘동감하는 쾌락’을 맛본다. 이것을 통해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사회로 전락하기 쉬운 사회가 동감에 의해 질서를 유지한다.10) 아담 스미스는 이것을 “조물주의 위대한 계율”11)이라고 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조물주의 위대한 계율”이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이런 동감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동적으로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짐승이 되고 만다. 동감을 통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지속적인 신앙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계율”을 인식시킴으로 이기심을 극복하게 해야 한다. 이런 동감적 행동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쾌락 때문이다. 이 쾌락은 막스 베버의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고 금욕적으로 추구하는 태도와 관련을 맺는다. 이렇게 동감은 금욕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그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쾌락을 느끼게 한다. 이 쾌락은 신앙이 주는 쾌락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쾌락이다. 성령님은 이 기쁨을 통해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부의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신다. 이런 모습이 훨씬 성경적인 경제관이 아닌가?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유무상통된 재산들은 사유재산을 성령의 감동에 의해 자발적으로 재분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이러한 사도행전 2장의 경제 구조를 설명해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가 될 수는 없다. 모든 프로테스탄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다. 그 때문에 근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천민자본주의 태도로 부를 축적하고 억압하며 계급을 형성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두 가지 양태를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경적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미주

1) 코넬리우스 반틸,「변증학」,신국원 역,(개혁주의신학사,2017),P.55.

2) 인간의 신화(神化)는 헤겔의 변증법의 전개 방식이다. 헤겔은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서 신의 실체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는 “절대자란 본질적으로 인류의 결과이며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은 실체가 된다”고 했다.(로버트 터거,「칼 마르크스 철학과 신화」,김정기 역,(성광문화사,1987),P.67.

3)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이재학 역,(지식노마드,2018),P.67.

4) 임승수,「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시대의창,2012),P.53.

5)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문제 옮김,(현대지성,2018),p.85.

6) Ibid.,p.87.

7) Ibid.,p.88.

8) Ibid.,p.92.

9) 오가와 히토시,「애덤 스미스, 인간의 본질」,(이노다임북스,2015),P.39.

10) Ibid.,p.44.

11) Ibid.,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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