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야기의 시작 : 황제의 비텐베르크 점령(1547년)

신용목 전도사는 기독교교육(고신대학교)과 목회학(고려신학대학원 M.Div)을 공부했으며, 지금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교의학 Th.M) 과정 중에 있다. 대전동북장로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성경과 교회역사에 뿌리 내린 보편적 교회에 관심이 있다.

“황제는 교황과 결탁하여, 종교개혁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자 했다. 루터가 죽은 지 불과 1년 만에 비텐베르크는 황제의 손에 떨어졌다. 황제는 곧바로 로마교적인 종교법을 선포했다. 루터파 지도자 멜란히톤은 칭의 교리를 훼손하는 종교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칭의 교리는 보존하면서, 로마교 실천은 비본질적인 문제(adiaphora,아디아포라)로 받아들이는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을 제안한다….”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역자였다. 그는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독일의 선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러 개혁자들이 그를 존경했으며, 루터 사후에 루터파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그를 향한 존경이, 한순간 비판으로 바뀐 사건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라이프치히 잠정 협정(Leipzig Interim)”이다.

당시 독일(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Karl V, 1500-1558)였다. 그는 한때 유럽 대부분을 통치했던 비범한 황제였다. 루터 생존 때에는 프랑스, 터키 문제를 다루느라, 루터파 세력과 대립을 피했다. 외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적극적으로 독일의 종교 문제를 정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종교개혁 도시 연합인 슈말칼텐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을 무력화시키고, 루터파의 심장 비텐베르크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황제의 목적은 로마교적인 종교 일치였다.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2. 멜란히톤의 선택 : 라이프치히 잠정 협정(1548년 12월 22일)

황제의 군대가 비텐베르크로 들이닥쳤을 때, 루터파 지도자 멜란히톤이 있었다. 그가 황제의 로마교적 종교 일치법에 대응하는 길은 네 가지였다. 첫째, 복종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길, 둘째, 저항하여 순교하는 길, 셋째, 교구민을 버리고 망명하는 길, 넷째, 온건한 조약으로 타결하는 길이었다. 멜란히톤은 네 번째 길을 선택한다.

멜란히톤은 칭의 교리만 지키고, 그 외 문제는 ‘아디아포라(비본질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로마교를 받아들이기로 타협한다. 이것이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루터파 내부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는다. 반대자는 그의 선택을 그리스도와 벨리알,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더러운 연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이 합당할 정도로 라이프치히 잠정협정 내용은 지나치게 타협적인 면이 있었다.

 

3. 긍정적 평가 : 이신칭의

그럼에도 멜란히톤의 선택을 온정적으로 평가해보고자 한다. 먼저, 멜란히톤에게 로마 교회와의 일치/화해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는 평가(박경수, 87)에 동의한다. 이에 더하여, 멜란히톤은 칭의 교리가 로마 교회 안에 만들어낼 ‘역동성’을 기대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칭의만 설교할 수 있다면, 로마교회도 변할 것이다”라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멜란히톤은 칭의 교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온정적인 평가를 해볼 수 있겠다.

 

4. 부정적 평가: 연합 그리고 내부 분열(아디아포라 논쟁)

멜란히톤은 본질적인 교리는 지키면서, 루터파와 로마 교회가 연합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멜란히톤의 기대와 달리, 루터파 안에서 일명 “아디아포라 논쟁(비본질적인 요소가 존재하는가?)”이 터졌다.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은 루터파 내부 분열의 씨앗을 제공한 것이다. 멜란히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박해 상황에서는 그 자체로 해가 없는 아디아포라인 예식들도 더 이상 아디아포라가 아니게 되며, 선한 양심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박경수, 79)고 주장했다. 이 지난한 아디아포라 논쟁은 루터파의 “일치신조”(1577년)가 나오기까지 계속되었다.

멜란히톤은 평화와 연합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생각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칭의 교리만 놓치지 않으면, 로마 교회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잠정협정에 따른 교회는 단순히 로마 교회처럼 보였다. 교회 연합은 한 가지 교리를 지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멜란히톤은 루터파 사역자들이 자신을 따라와 줄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만큼 멜란히톤은 존경받는 루터의 후계자였으며, 탁월한 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디아포라 논쟁에서 그를 끈질기게 비난했던 사람은 자신의 제자 플라키우스(Matthias Flacius)였다. 외부 문제에 대한 낭만적 대응은 오히려 내부에 큰 균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5.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오늘날 우리의 현장인 교회는 어떤가? 최근 한국교회에서 많은 문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카이퍼의 영역 주권에 따른 세계관 운동은 한국교회의 문화 운동을 주도해왔다. 이 운동은 각 영역 속에 깃든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하나님 영광과 주권을 실현하고자 한다. 교육, 학문, 예술 등 영역에서 좋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요즘에 소위 공공신학 붐이 일어났다. 공적인 삶에 신학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침묵했던 과거의 한국교회를 반성하며 일어나는 운동이다. 사회, 정치의 영역에서 신학적 목소리를 내는 긍정적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화-정치적 운동 기저에는 모든 삶을 하나님 말씀의 기준대로 행동하려는 선한 열망이 가득하다.

멜란히톤 이야기에 비춰본다면, 최근 일어나는 한국교회 문화-정치적 운동은 이 땅 위에 ‘아디아포라(비본질적인 문제)’는 없다는 입장과 비슷하다. 하나님 말씀대로 모든 삶의 문제를 다루려는 선한 의도이다. 이러한 운동에 긍정적인 열매들이 많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멜란히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비본질의 문제로 보면서도, 칭의 교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적에게 내어주어도, 단 하나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길 원하면서도, “칭의” 교리는 쉽게 내어주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소위 ‘문화운동’에 집중하다가 ‘칭의 교리’는 놓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멜란히톤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장을 반성해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 문화-정치 운동의 중심성은 혼란스럽다. 복음과 교회는 뒤로하고, 오히려 세상에 큰 방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복음 설교를 잃어 가는데, 세상에 대한 외침은 커지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화-정치 운동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 설교의 연장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다이포라-비본질적인 문제는 없다”는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멜란히톤의 교회 연합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일으킨 루터파 내부 분열에 주목해야 한다. 멜란히톤은 외부적 문제를 ‘연합’이라는 낭만적 기대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부 분열이었다. ‘연합’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작금에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여러 기독교 단체가 추진하고 있는 종교의 정치 연합 운동은 우려가 된다. 이 정치 연합 운동에 한국교회의 교단들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교단적으로 정치 연합을 지지했다면,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내부에 여러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고조되는 좌-우 갈등이 교회 분열 문제로 연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런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는 목소리를 낮추고, 한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박경수, “멜란히톤의 수수께끼: 라이프치히 잠정협정과 아디아포라 논쟁,” 장신논단 50(3), 2018.9, 63-91.

마르틴 융,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이미선 역(서울: 홍성사, 2013), 168-175.

월리스턴 워커, 『기독교교회사』, 송인설 역(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1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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