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예전에 필자는 전도사 시절에 사역 했던 교회의 집사님을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집사님은 필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터라, 이 우연한 만남을 매우 반가워했다. 그 분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집사님은 갑자기 필자에게 “목사가 되면 절대로 부자로 살지 마라”는 조언을 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아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 했다.

“네 알겠습니다. 집사님. 저도 집사님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집사님도 절대로 부자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님의 표정에서 필자는 불쾌한 심기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집사님은 필자에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했다.

“아니 제가 왜 부자로 살면 안 된다는 겁니까?”

그래서 필자도 되물었다.

“집사님, 그러면 저는 왜 부자로 살면 안 되는 거지요?”

이 반문에 그 집사님은 “당연히 전도사님은 성직자니까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를 통해서 독자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가 은연중에 부자가 된다는 것은 곧 세속적인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논리가 성경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공생애 기간 가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형편에 대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다. 세례 요한도 메뚜기와 석청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마 3:4). 사도들도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서, 성경이 신자들에게 가난한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은 비약이다. 구약을 보자 다윗이나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를 성경은 정죄하지 않는다. 또 신약에서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부자를 정죄한 부분도 없다. 뿐만 아니라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가운데 부자로 살았던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정죄하지는 않았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부자가 아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를 정죄한 것일 뿐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를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으로 잘 해명해 주었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막스 베버가 “천민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근대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막스 베버는 종교개혁 이전에도 천민자본주의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에도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기의 배만 채우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단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여기서 핵심은 ‘구원의 확실성’을 경건한 경제활동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의 확실성을 종교행위에서 찾았다.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금욕을 행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은 구원의 확실성을 종교 행위에서 찾았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 구원의 확실성을 더욱 명확히 갖고자 했던 사람들은 수도원에서 철저한 금욕행위를 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찾으려 했다. 로마 가톨릭이 구원의 확신을 종교 행위에서만 찾음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성속을 이원화시키게 됐다. 성속의 이원화는 자동적으로 불교처럼 세속의 삶에 대한 책임과 도덕성을 약화시켰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을 일상의 삶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만 찾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납득이 잘 안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구원의 확실성을 종교 행위에서만 찾음으로 종교적 열성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지만,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도덕성과 책임감은 세상과 전혀 구별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광신에 빠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구원의 확신 교리를 잘못 가르친 결과이다.

그러면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실성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이들은 일상 속의 거룩한 삶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찾았다. 한 마디로 ‘성화’(sanctification)에서 찾았다는 말이다. 이들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처럼, 삶 속에서 재물을 정직하게 모으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구원의 확실성을 찾으려 했다. 이런 차원에서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에게 재물은 목적이 아니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으로 취급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천직’과 ‘소명의식’이 나온다.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빵을 굽더라도, 시계를 만들더라도, 청소를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태도로 일을 했다. 이런 직업의식에 의하여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불리는 ‘장인’(匠人)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천민자본주의자들처럼 부의 축적을 위해 남을 속이고 억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부의 축적이 남들보다 호화롭게 사는 데 있지 않았다. 이들에게 부의 축적은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산 결과라고 생각했다. 더 놀라운 점은 프로테스탄트 자본가들은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하면서 그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다는 점이다. 이들은 과거 가톨릭의 수도원 금욕을 삶의 영역(경제활동)으로 옮겨서 여기서 ‘구원의 확실성’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검소하게 살고, 근면과 정직과 성실로 경제활동을 한 후에 부자가 되면, 이것을 통해서 구원을 확신했다. 이렇게 형성된 근대자본주의에서 부자는 결코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도리어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세 가지 골격이다. 막스 베버는 그 세 가지 골격을 ‘하나님의 주권’, ‘선택과 예정’,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했다. 이는 종교개혁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이 핵심 가치가 없는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에 불과하다. 오늘날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노동을 경시하고, 부자를 경멸하며, 마르크스주의 자본론에 환호하게 된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결여된 상태에서 자유시장경제만 외치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수 우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만 하면 보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것이다. 본질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그 저변(底邊)에 탑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주의가 되고, 자유시장경제는 약육강식 생존경쟁이 판치는 야수의 들판이 될 뿐이다.

 

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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