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國이 아닌 曺國의 일로 혼란을 겪는 시대를 향해....

천헌옥 목사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나훔 3:5-6)

하나님께서 나훔의 입에 넣어준 니느웨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큰 성 니느웨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았는데, 아마 이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일부 가졌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요나는 그 성을 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였고 니느웨는 즉각 일반 백성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겸손히 재에 앉아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하는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이 니느웨는 역사적인 도시임에는 틀림없고 하나님이 나훔 선지자를 통하여 니느웨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으로 읽히지만, 이 세상을 통틀어 하나의 죄악의 도성으로 보고 주신 말씀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나훔을 통하여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니느웨에게만 국한된 말씀이라면 굳이 모든 시대의 성도가 함께 읽어야 하는 정경에 들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하여지고 귀찮을 정도의 전도를 받는 이 세상을 향하여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

세상은 에덴동산에 찾아온 마귀의 거짓말로 인하여 타락되었고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참과 거짓, 진실과 거짓, 진리와 비 진리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종교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지금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교묘히 사람을 속이는 마귀의 거짓말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하와가 속았겠는가? 마귀는 사람이 듣기에 정말 그럴싸한 말로 속이기 때문이다.

그 마귀는 칸트에게 사람의 생각을 주어 네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고 하였고 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철학적 주장을 내놓게 된다. 신앙과 철학 사이에서 고민도 했지만, 이성으로 많이 기울어진 그는 하나님의 큰 지식과 지혜를 팽개치고 작은 두뇌의 그릇으로 사람을 진단해 가기를 원했다.

이렇게 시작한 철학은 헤겔의 제자 슈트라우스에 와서 문제가 생겨 결국은 좌와 우가 나뉘게 된다. 슈트라우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출판해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예수를 신화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기존의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보수(지키는 자)가 되고 슈트라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진보(뛰어 넘어 나아가는 자)가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진리와 거짓의 싸움은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양 진영이 나뉘어 싸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거짓을 퍼뜨렸고 그것을 옳다고 두둔하며 변명하는 사람들 중에 칼 맑스가 있었다. 맑스의 시대에 와서 두드러지게 거짓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결국 맑스의 제자 레닌은 쌍트베테르부르크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성공한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나고 보니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상주의였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비록 경제 분야에서 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맑시즘의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칼이라는 사실이다. 맑시즘을 실천하여 진리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인 건 사람들뿐이었지 진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략을 바꾸어 나왔다. 그것이 네오맑시즘이다. 네오맑시즘은 기존의 맑시즘에 휴머니즘을 입혀 나온 것을 말한다.

그들은 서서히 사람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이 제일이다. 내가 만족하여야 한다. 사람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등등의 케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걸고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내세운다. 신권시대에서 인권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명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소수자 인권법 제정으로 동성애 허용, '간통은 죄가 아니다.' ‘낙태는 죄가 아니다’라는 등등 인간의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마귀의 사탕발림의 꾀에 넘어간 인간들의 결과들이다.

구약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소적이었다. 어떤 나라는 흔적조차 없어지게 망하여 그런 죄악이 심판을 받았다. 소돔 고모라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제는 온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 세상은 좌우가 극명하게 나뉘었고 그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祖國이 아닌 曺國의 일로 혼란을 겪고 있다. 거짓말 대 진실의 공방이 40여 일이나 계속되었다. 국민들은 넌더리가 난다고 몸서리친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대목에선 모르겠다. 알아보겠다고 답변을 피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에선 핏대를 세운다. 여당 대변인도 한몫 거든다. 기자들이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이 국회 정론관을 사용한 것이 적법하냐?’는 질문에 볼펜 이야기를 계속 꺼내 기자를 기레기(기자 쓰레기)라고 몰아붙이는 일도 발생하였다.

기자들도 죽창 이야기를 꺼냈던 후보자이기에 일제를 지우자는 그가 어찌 일제 볼펜을 들었느냐는 조크로 했던 말인데 그것만 꼬투리 삼아 물고 늘어졌다. 본질을 두고 왜 사소한 것으로 매도하느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장소 역시 본질이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과정은 불법이라도 좋다는 식으로 읽힌다.

청문회가 열렸지만, 지극히 몸을 낮춘 조 후보자는 때로는 사과하면서 때로는 해명(변명)하고 때로는 모르쇠가 되었다. 국민들의 양심은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쪽이 더 많다. 이제 공은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볼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 때에도 이스라엘만 관심 있으신 게 아니라 이집트나 바벨론, 니느웨도 관심을 가졌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이다. 회개하면 덮어주시지만 스스로 덮으려 하면 치마를 얼굴까지 걷어 올려 부끄러운 수치를 뭇 사람에게 보이실 것이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응하게 하실 것이다. 혹여 묻혀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심판의 날에는 벌거벗은 몸으로 숨길 수가 없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비록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과 하나님 말씀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보는 자들은 깨어 근신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인 주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학문을 접하는 태도를 이렇게 가르쳤다. 居敬窮理(거경궁리)였다. 이는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냥 생각만 많이 하고 공부머리만 키워 궁리가 커지면 꾀가 나온다. 마음을 경건하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격물치지하여야 한다고 주자는 가르쳤다. 格物致知(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을 말한다. 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없었지만, 양심은 살아 있어 말씀의 가르침을 대신하였을 것이라고 보인다.

우리는 말을 청산유수와 같이 잘하는 것을 부러워하고 닮기를 원하고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자를 배로 존경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은 겨와 같아서 바람에 날려가 흔적도 없어지겠지만 진실은 생명이 있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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