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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담아내는 교회론은 가능한가?

기사승인 2019.05.29  07: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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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미래교회포럼 제2차 세미나

미래를 담아내는 교회론은 가능한가?

교의학적/교회사적/주석적/실천적 접근

고려신학대학원 이성호 교수/ 이 글은 “미래를 담아내는 교회들”이라는 주제로 지난 21일 대구 대현교회(담임 정광욱 목사)에서 열린 2019 미래교회포럼 제2차 세미나에서 이성호 교수가 발표한 원고이다.

 

본문: 에베소서 5장 31-32

 

서론

인공지능에 근거한 4차 산업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서도 교회가 “꼭” 필요할 것인가? 교회가 필요하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것인가? 만약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즉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아야 할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여기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규범으로 여기는 개혁파 교회는 앞에서 열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여긴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르고, 또한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신학을 구축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더 나아가 개혁신학은 어떤 특정한 한 교리, 혹은 몇몇 교리들을 강조하지 않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tota Scriptura)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성경의 특정한 교리(예: 전도, 선교, 중생)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학이나 오순절 신학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개혁신학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신앙고백서가 대단히 권위있는 것으로 존중되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은 오늘날 거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통전성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그들은 성경신학에 있어서도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 요한신학, 바울 신학이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조직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바르트신학, 몰트만 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아시아 신학,.... 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참된 신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신학“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 결과 신학의 파편화가 뿌리 깊게 진행되었고 신학은 인간학이 되었다.

이러한 신학의 파편화는 자유주의 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신학을 고백하는 학교에서도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에 비해서는 현저히 나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정도는 아니다. 전통적인 신학의 4분과(조직, 성경, 역사, 실천)는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방식 혹은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이 신학의 각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즉 조직신학을 배우든, 역사신학을 배우든, 성경신학을 배우든, 실천신학을 배우든, 성경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론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교회론을 “교회”만에 대한 교리라면 그것은 종교학이나 사회학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 각자의 소견대로 옳은 대로의 교회들에 관한 이론이 난무하게 될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론은 성경에 계시된 교회, 곧 성부 하나님의 백성, 성자 하나님의 몸, 성령 하나님의 전으로서 교회, 즉 신학적인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론도 신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에베소서 5장 31절-32절에 대한 주해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교의학적 측면에서 본 “이 비밀이 크도다!”

에베소 5장은 교의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의 하나인 교회의 기원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를 말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기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니케아 신경(381년)에 따라 교회를 하나라고 고백한다고 하면 더욱 그러하다. 교회의 하나됨은 공간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교회가 하나다”는 말은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말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교회와 마지막 교회가 같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혁파 신학의 대표적인 신조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교회의 기원을 다루고 있으며 그 기원을 창조에서 찾고 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모두가 교회의 기원에 있어서 놀라운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이 그와 같이 동일하게 고백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에베소서 5장 31-32절이다. 이 본문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기원을 시내산 언약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성립에 두지 않으며, 심지어 오순절 성령 강림에도 두지 않는다. 교회는 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교회의 기원이 창조에서 시작한다는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6:18). 하지만 우리는 에베소서의 이 본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약속을, 예수님께서 뭔가 새로운 자신만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미 존재해 왔던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기원을 오순절에 두지 않음으로 인해서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베드로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논증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기원을 창조에서 시작하고 그 기원이 아담과 하와라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단순히 부부 관계를 넘어서 교회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개혁파 신조는 이 점에서 창세기 2장의 본문을 교회의 관점에서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안내서가 된다. 어떻게 보면, 창세기 기사를 교회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바울 사도를 통해 얻은 신약 성도의 큰 특권이고, 이 관점을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개혁파 신자들의 특권이라고 할 것이다.

 

2. 교회사적 측면에서 본 “이 비밀이 크도다!”

우리의 본문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본문에서 사용된 ‘비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미스테리온(µυστήριον)’이다. 초대 교회에서 결혼은 그야 말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로 이해되었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결코 나눌 수 없는 생명의 언약으로 이해되었다. 로마서 7장 1절에서 가르치듯이, 혼인은 생명의 언약이기 때문에 배우자가 살아 있는 한 서로는 언약으로 굳게 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성경적 이해를 뛰어넘어서 혼인을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되는 성례로까지 발전시키는 사고방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로마 교회 안에 정착하였다.

“미스테리온”이 성례를 의미하기도 하는 세크라멘툼(sacramentum)이라는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교회 안에서 혼인이 성례의 하나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혼인이 로마교회에서 7성사 중의 하나로 이해된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가 이 번역상의 오류 때문이었다. 로마교회가 혼인을 7성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실천적 교훈이 교회 안에 자리 잡았다. 혼인은 성례이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은혜로 두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켰기 때문에, 이론상 재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다. 로마교회에 있어서 배우자가 살아있을 경우 오직 한 번의 결혼만 인정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재혼의 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것은 혼인무효(annulment)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졌던 결혼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혼인 자체가 없었으니, 혼인 무효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이것은 이론상 재혼이 아니라 초혼으로 간주된다.

혼인을 성례로 보았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오직 한 번의 결혼만이 참된 결혼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지킬 수 있었으나, 혼인무효라는 비성경적 교리를 생산해 냄으로 혼인에 대한 절대권을 교회가 갖게 되었다. 사실, 16세기 잉글랜드 교회에 있어서 이 혼인무효권을 누가 갖는가가 영국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교황이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혼인무효를 선언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왕위계승이 위태롭게 되자, 헨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영국교회의 머리로 선언하면서 로마교회와 결별을 하였다. 수장령을 통해 혼인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게 되자, 헨리는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헨리는 통틀어 6번의 결혼을 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자기 아내를 옥에 가두고, 처형하고, 이혼을 강요하였다. 적어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혼인에 있어서만큼은 거짓교회인 로마 교회에 비해서 타락한 면을 보여주고 말았다. 사실, 종교개혁은 혼인이 성례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 점에서는 큰 개혁을 이루었지만, 혼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일관성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고민은 잉글랜드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혼인은 생명의 언약이기 때문에 배우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음행과 고의적 버림의 경우에는 무흠자(innocent party)에게 재혼을 허용한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음행과 고의적 버림을 배우자의 죽음으로 해석함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지는 신학적 성찰이 보다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은 한국의 장로교회는 이 두 가지 외에 수많은 불가피한 조건들이 이혼과 재혼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교회는 그것들을 허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혼인이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미래의 교회론 역시 혼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장로교회(PCUSA)는 혼인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두 사람 사이의 결합”으로 변경시켰다. 이 변경으로 인해 동성부부들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의 흐름, 특히 신조를 무시하는 성경해석은 미래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본 “이 비밀이 크도다!”

오늘 본문은 성경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인용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지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던 본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당연히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가 버릴 수 없는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버릴 수 있는가였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를 버릴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 버릴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정신병이 걸린 경우, 에이즈에 걸린 경우,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불구가 되어 성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 그 아내를 버릴 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이다.

 

1. 이 본문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이 인용한 창세기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나눔의 불가능을 이야기하였다. 사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께서 한 몸을 이루셨다”는 언급만 있는데, 예수님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끌어내었다. 이것은 혼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다는 말은 참 많이 하지만, 그들 중에 과연 얼마나 정말로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 주셨으니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실제로 많은 경우에 서로가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은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였을 뿐이다.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답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그 유명한 신명기 24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하였나이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였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이 답은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이야말로 모세의 율법을 정확히 읽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창세기에서는 이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신명기에서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글을 잘못 읽고 있었다. 모세의 말을 정확히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을 때, 그리고 이혼 증서를 써서 자기 집에서 내보냈을 때, 그리고 그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 남편도 그 여자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자기 집에서 내보냈을 때, 전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 이 문장에서 모세의 명령은 딱 하나이다. “전 남편이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 앞의 모든 문장은 조건절에 걸린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버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그 당시 일어나는 상황을 묵인 혹은 허락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묵인을 명령으로 이해하였고, 예수님은 묵인을 묵인으로 정확하게 보았다.

이제 예수님은 “본래는 그렇지 않다”라고 선언한다. 본래 모세의 명령이 무엇인가?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이 구절이 누가 한 말인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 보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노래 바로 다음에 나오니까 아담이 한 말처럼 보이지만 아담이 한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도 아니다. 결국 모세의 신학적 해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인간 창조에 대한 모든 기사를 쓰고 결론을 내릴 때, 성령에 감동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의 말에 근거하여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올바로 해석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내를 버릴 구실만 찾고 있었고, 성경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 시키고자 하였을 뿐이다.

 

2. 이 본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이해

바울 사도는 부부의 관계를 넘어서 이 본문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선언한다. 성경에서 비밀이라는 것은 특정인만 알 수 있는 특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감추어졌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막연한 유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창세기를 처음으로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창세기 2장 24절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떻게 이 본문에서 그와 같은 비밀을 알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의 성경을 인용할 때, 그 인용된 구절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구절이 선택된 것은 그 구절이 위치한 모든 맥락 속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인용구가 나오게 된 배경과 문맥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그 배경을 잘 알고 있다. 잘 안다는 말이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도 이 구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로 창세기 1장에 따라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과는 달리 남자를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시고,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장의 기록을 보면 어려서부터 성경에 익숙한 사람은 여자의 창조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과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이다(딤전 2:13).

아담의 독처가 좋지 않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돕는 배필을 만들기 위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흙으로 수많은 동물을 지으셔서 그 중에 하나가 아담의 배필이 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아담에게 데리고 왔고, 아담은 각각의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동물 속에서 아담은 배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선택을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남자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도 한 명만 만들었다. 하나님은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말라기 2장 15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를 만든 방식도 아주 독특하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들되 아담의 몸의 한 부분을 취하셔서 만들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 때나 동물들을 만들 때와 같이 흙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와의 본성이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와 같이 흙으로 하와를 만들었다면, 그 둘은 한 몸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와가 남자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라 칭하게 되었고(창 2:23) 하나님은 그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역을 아담이 잠들었을 때 실시하였다. 아담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순전히 자신의 계획에 따라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어 내었다. 하와의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에게로 (아담이 하와를 숲속에서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이끌어 오셔서 짝을 지어 주셨다.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좀 길게 이야기하였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는가?” 그냥 간단하게 빛을 창조했을 때와 같이 ‘빛이 있으라!’라는 식으로 “아담과 하와가 생겨라!”라고 말씀 한 마디면 끝날 일을 하나님은 왜 이렇게 복잡한 긴 과정을 거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는가? 창세기의 이 본문을 수없이 읽었던 바울조차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 바로 그것은 이 본문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이 본문을 다시 보니, 그제야 비로소 바울은 이 본문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는 탄성을 여기서 터뜨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면서 단순히 남녀를 지으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이상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남녀를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본질을 담기를 원하셨다. 그 본질은 둘이 하나되는 것이며, 그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다. 이 본질이 아담과 하와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고, 바울은 이 창조 기사를 읽으면서 그 비밀을 계시로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단순히 그 구절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 앞의 벌어진 모든 사건을 총체적으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실천신학적 측면에서 본 “이 비밀이 크도다!”

오늘 본문은 실천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계시 의존적 사색이라는 개혁신학의 방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행복한 부부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소위 가정 사역을 하는 분들을 보면 그 방법이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행복해 보이는 신앙의 부부들을 연구하고 조사해서 어떤 요소가 행복한지를 공통적으로 찾아낸 다음 그것들을 신자들에게 소개합니다-“이렇게 하면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다.”

개혁파 신학의 방법은 이와 정 반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성경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전 인격의 타락을 믿기 때문에 행복한 부부를 알 수도, 그것을 원할 수도, 그것을 이룰 수도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인간의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부부라고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경의 기준에 따르면 진정한 부부는 어떤 모습인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닮는 부부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 주님은 너무나 쉬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보지 않고, 오른 팔과 왼 팔의 관계로 본다. 그들은 남녀 사이에 신체적 차이 이외의 어떠한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른 팔과 왼 팔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부부의 모습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지 않고, 아담과 스티브를 만들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다운 부부의 관계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관계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여성 안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오른팔과 왼팔의 관계로 보게 되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을 현저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첫째 목사의 직무를 가볍게 여긴다. 목사를 단지 성경공부를 잘 가르치는 선생 정도로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자일뿐 아니라 보이는 말씀인 성례를 집행하고, 권징을 시행하는 자이다. 만약 아내가 목사라고 가정해 보자.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내가 전하는 말씀에 남편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는 또한 아내가 제공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서 먹고 마셔야 한다. 더 나아가서 남편이 아내에게 불순종할 경우에 그는 아내에게서 권징을 받고, 교회에서 출교를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성경적 기준에서 보면, 이 부부는 가장 불행한 부부일 뿐이다.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은 또한 아내의 직분과 소명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더 이상 집안일이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2장 15절은 이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은 여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녀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물론 이 구절은 해석하기 쉬운 구절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여자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5장 14절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디도서 2장 5절에도 젊은 여자들이 해야 할 것으로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오늘날 여성들은 출산과 집안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소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뭔가 다른 것에서 더 고상한 소명을 찾으려고 한다. 오늘날은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절대적 평등으로 가는 경향이 매우 많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하나됨이 오른팔과 왼 팔의 하나됨인가 아니면 머리와 몸의 하나됨인가이다.

 

결론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교회의 기원을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교회가 하나라면 처음에 시작된 교회와 미래에 있을 교회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에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처음 교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기독교 단체나 동호회라고 할 수는 있으나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최초의 교회와 미래의 교회가 형태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다. 미래의 교회가 어떻게 교회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앞에서 밝혔듯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볼 때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본질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 하나됨은 오른 손과 왼 손의 하나됨이 아니라 머리와 몸의 하나됨이며, 교회에서 남녀 간의 질서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또한 이 샬롬의 질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여 침묵을 만들어내는 세상적 방식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짊어져서 하나가 되는 방식, 즉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롬 15장).

교회의 본질을 이와 같이 이해했을 때 미래의 교회는 여러 방면에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먼저 “둘이 하나됨”이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결혼도 자유를 억압하는 속박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는 교회에 대한 이해에도 결정적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는 곳이 아니라 내가 골라서 선택하는 곳으로 바뀌게 된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 오직 경쟁력 있는 교회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머리와 몸”이라는 교회의 질서 역시 크게 도전을 받을 것이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복음은 여성의 권익을 크게 신장시켰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별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남녀 차별이지만 여성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남녀 간의 어떠한 구별도 차별로 인식하며 구별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남녀의 질서를 설득력 있게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적 흐름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어렵더라도 교회의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물론 우리가 가야할 길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우리가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가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속박이 아니라 풍요로움이라는 것, 머리와 몸이 차별이 아니라 진정한 샬롬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주어야 한다.

미래의 교회론은 창조뿐만 아니라 종말을 통해서도 확증되어야 한다. 우리는 종말에 있을 교회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보게 된다. 놀랍게도 교회의 시작과 교회의 종말은 아주 유사하다. 혼인에서 시작된 교회는 혼인으로 마친다. 이 혼인 잔치를 성도들이 오늘날 실제적으로 미리 경험하는 자리가 예배이다. 전혀 다른 둘이 하나가 되어 천국의 샬롬을 경험하는 곳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성찬식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와 달리 성찬은 그 자리에 참석해야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잔치이다. 이 점에서 지나친 설교나 찬양 중심적 예배는 미래 교회에서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성호 webmaster@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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