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못할 변경

정규동 목사(샬롬교회 담임)

3. 이해 못할 변경

가사 개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가사 개정에 그 이유가 불분명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그것이 ‘성도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1) 197장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전에 찬송가에서 ‘어제나 오늘도’를 ‘어제도 오늘도’로 바꾸었다. ‘어제나 오늘도’ 안에 두 날을 강조하는 의미가 다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어코 두 개의 ‘도’를 넣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전에 찬송가 가사가 우리가 생활 중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이렇게 바꾸었을까?

2) 284장 (오랫동안 모든 죄 가운데 빠져)

‘은혜 받을 날과 구원 얻을 때가’→ ‘은혜 받은 날과 구원 얻을 때가’ 에서 시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구원’은 그대로 두고 ‘은혜’만 과거 시제로 바꾸었을까? ‘지금 온 세상에 선포되었기’ 때문에 은혜와 구원을 받는 것은 그 뒤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표시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리고 왜 은혜와 구원 받는 시제를 구분 했는가? 먼저 받고 나중 받는 것이 어디 있는가?

3) 462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

3절에서 ‘모든 싸움 물리치고’를 ‘모든 싸움 다그치고’로 바꾸었다. ‘물리치고’와 ‘다그치고’는 뜻이 완전히 다른 단어이다. ‘다그치다’는 ‘일이나 행동 따위를 빨리 끝내려고 몰아치다’는 뜻이다. 원문의 뜻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다그치는’분이 아니기 때문에 원문을 살펴보지 않아도 이게 아니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영적 전쟁을 이겨서 물리치는 분이지, 다그치는 분이 아니다.

4)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2절에 ‘말씀으로 힘써 싸워 이기며’를 ‘용감하게 힘써 싸워 이기며’로 바꾸었다. 힘써 싸우는 것에 ‘용감하게’를 더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말씀으로’와 짝을 이루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3절에 나오는 ‘성령으로’이다. 말씀과 성령. 이 둘이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을 ‘용감하게’로 용감하게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 남은 가사가 그만 외롭게 되었다.

 

4. 한 절 안에 같은 의미 반복

찬송가 가사는 거의 3절이나 4절로 되어 있다. 간혹 5절이나 6절로 된 찬송가도 있다. 그리고 한 절의 가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구절 안에 같은 단어를 반복되게 손질했다는 것은 손질하는 분이 전문가가 맞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전에 가사가 혹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치고 다듬어야 할 판에 좋게 한다고 하면서 전에 보다 못하게 고쳤으니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1)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2절에는 ‘고쳐 주소서’라는 구절이 3번 나온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래 두 번이었는데 고치면서 한 번 더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주 앞에 엎드려’를 ‘날 고쳐 주소서’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동일 절 안에 같은 문장이 3번이나 반복되었다. 가사를 바꾼 후에 한 번 점검도 안 해 봤다는 말인가? 한 번 불러 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2) 218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개정 찬송은 4절 둘째 단의 가사를 통째로 다 바꾸었는데, ‘주 성령을 내 맘에 채워 늘 충만케 하소서’로 수정했다. 성령을 무슨 물건처럼 채운다는 것도 이상한 표현이지만, 중복되는 의미가 나열되어 있다. ‘채운다’와 ‘충만’은 같은 의미이다. 채워지면 당연히 충만하게 되기 때문에 반복해서 쓸 이유가 없다. 고칠 때 이것까지 생각해서 다른 단어를 골라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5. 의미에 오류가 있는 가사

이 부분은 잘못 개정한 것도 있고, 전에 사용하던 잘못된 가사를 고치지 않은 부분도 있다.

1)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1절에 ‘우리 대장 예수 기를 들고서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을 보라’는 가사가 있다. 이것은 전에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 그대로이다. 예수님이 기를 들고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앞서 가시니 주의 군사들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군대에서 기를 드는 사람은 기수라 부르며 기수는 군병 중에 한사람으로 정해져 있다. 대장은 절대로 기를 들지 않는다. 기수가 쓰러지면 다른 병사가 그 기를 들고 간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기를 들고 가신다고 했을까? 대장이 체통에 벗어나게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개정할 때 이 부분도 손질했어야 했다.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이것만 고칠 것이 아니라....

2) 362장 (주여 복을 주시기를)

이것도 수정할 때 놓친 부분에 속한다.

3절에 ‘온유하신 나의 주여’ 그리고 4절에 ‘전능하신 성령이여’가 있다. 우리는 성령님을 말할 때 주로 ‘전능하신 성령’이라는 표현 보다는 ‘온유하신 성령’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리고 4절과 5절의 둘째 단에 ‘능력 있는 주의 말씀‘과 ’풍성하신 주의 보혈‘이라는 가사도 역시 문제가 있다. 능력 있는 주의 말씀은 괜찮으나 풍성하신 주의 보혈은 뭔가 이상하다. 이것도 두 가사를 서로 바꾸면 훨씬 더 어울릴 것이다.

’풍성하신 주의 보혈‘을 ’능력 있는 주의 보혈‘로.

3) 381장 (나 캄캄한 밤 죄의 길에)

이 찬송가도 수정할 부분이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친 경우이다.

‘영광스런 그 열매’와 ‘영광스런 주 얼굴’라는 가사가 4절과 5절로 같은 위치에 있다. 열매가 어떤 열매이기에 영광스러울까? 그런 열매는 있지도 않을뿐더러 이 가사가 ‘영광스런 주 얼굴’과 쌍을 이루어서 주님의 얼굴이 열매의 빛깔 정도 밖에 안 되도록 낮추고 말았다. ‘영광스런 그 열매’를 ‘아름다운 그 열매’로 바꾸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4) 388장 (비바람이 칠 때와)

이 찬송가에는 3절에 ‘병든 자와 맹인을’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소경을 맹인으로 고쳤다. 그런데 이것만 고칠 것이 아니라 3절 전체를 살펴보면서 다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3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능하신 예수께 나의 소원 있으니’ 그리고 난 뒤에 ‘병든 자와 맹인을 고쳐주심 빕니다‘로 이어진다. 앞에서 나의 소원을 말했는데, 뒤에는 전 세계의 병든 자와 맹인을 다 고쳐 달라고 했다. 이렇게 못할 이유도 없지만, 이렇게 해서 찬송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이 전달되겠는가? 이 부분은 ’나의 병과 약함을‘ 이렇게 고쳤다면 좋지 않았을까? 앞에 나의 소원을 말했으니까 내 소원이 따라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5)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

이 찬송가는 많은 성도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지금도 널리 애송되는 찬송이다. 후렴에 ‘성경에 써 있네’를 ‘성경에 쓰였네’로 고쳤다. 이 찬송은 예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배웠다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가사에도 예수님의 날 사랑하심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성경을 읽고 알았다는 것으로 ‘성경에 써 있네’가 합당하다. 과거 시제로 고칠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제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맞다. 지금도 내가 성경을 읽고 있고, 지금도 내가 그 성경을 통해서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대지 말고 그냥 두었어야 하는데 고쳐서 오히려 망쳐 놓았다.

 

6. 개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

위의 부분에 이어서 개정할 때 왜 이런 부분은 빠뜨렸나 하는 아쉬움을 말하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이 여러 번 모여서 작업을 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1)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1절에는 값비싼 향유를 드린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했다. 전에 가사가 그랬다. 그러나 성경에서 향유를 드린 여자는 죄인인 여자(눅7:36-)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요12:3)뿐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드렸다는 구절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다. 개정 위원 중에 신학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 갔을까? 치열하게 토론했다면 누군가 이 부분을 제기하여 토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것은 토론할 것도 없이 그냥 성경을 찾아보고 가사를 고치면 되는데 아쉽게도 그냥 넘어 갔다.

2)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죄의 빛 흉악하나’라는 가사가 나온다. 죄의 빛이 흉악하다는 말은 다른 찬송 가사에서나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이다. 어떻게 해서 죄가 빛을 발하나? 어떻게 해서 죄에 빛이 있나?

이 가사는 전에 찬송에서 쓰던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마도 처음에 번역할 때 ‘주홍 빛 같은 내 죄‘가 있으니 그 단어에 짝을 맞춘다고 그렇게 한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죄의 빛‘은 뭔가 이상하다.

3)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후렴에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라는 가사가 있다. 바다에 배를 띄워 나아 간다면 그곳이 항구나 포구가 되어야지 어떻게 ‘언덕’일 수 있을까? 언덕을 떠나서 한참 걸어간다면 배를 못 띄울 것도 없겠지만. 이런 의미의 오류를 손질할 때 왜 다듬지 않았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4)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이 구절은 성경에도 위배되는 말씀이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지, 다 쳐서 멸하라고 한 것은 한 군데도 없다. 그리고 마귀는 계시록 20장에서 무저갱에 갇힐 때 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로 다 쳐서 멸할 수가 없다. 안 되는 것을 왜 고치지 않고 넘어 갔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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