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동 목사(샬롬교회 담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가사를 언뜻 보면 몇 군데만 고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손질했음을 알 수 있다. 수정 작업을 한 분들이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내용을 대폭 수정” 하였다. 한국 찬송가 공회는 찬송가 가사 개정을 위해서 “신학자, 목회자, 국문학자들, 교회 음악 전문가가 대거 참석하여 10년 동안 수많은 모임을 통해서 만들어진 결실”이라고 했다. 그들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10년 동안 수십 차례 모여서 다듬고 고쳤으니 그 노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고쳐진 가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잘 된 개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전문가들이 위원회로 모여 다듬고 고치기를 수도 없이 거듭했을 것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개정 작업은 수십 차례 모임에서 치열한 토론을 통해 ‘성도적 공감’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 우리는 ‘국민적 공감’이란 말을 자주 쓴다. 찬송가는 모든 성도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다듬어진 가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도적 공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이제까지 주변 사람들이 토로하는 껄끄러움과 불편한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12년을 사용해 왔다. 이제 새롭게 다듬어진 찬송가의 필요를 느끼면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개정 작업자들이 전체 찬송가 가사의 수많은 부분을 수정했는데 그것을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묶어서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1. 안 해도 될 가사 개정

가사 중에 고치지 않아도 될 부분을 손질한 것이 많았다. 물론 그들이 작업하면서 ‘지금 고치지 않으면 언제 손보랴’ 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바 아니다.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들의 불편과 황당함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을 개정할 때도 입에 익은 것은 기어코 고치려 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호와’ 라는 성호이다. 야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여호와란 성호가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고치지 않았다. 또 ‘축복’ 이란 단어는 사람 간에는 사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하면 틀린다. 하나님은 시복자이지 축복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 말을 널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런 배려를 기억한다면 지금 현재 이 찬송가 가사가 입에 익어 있는 기성세대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치지 않아도 되는 구절은 그냥 사용하도록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고친 것들을 살펴보면 이것을 사용하나, 저것으로 고치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고쳐서 누리는 유익이 무엇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몇 가지 예를 제시하겠다.

 

1)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 찬송가에는 5곳을 고쳤다. ‘예수를’→ ‘예수님’ 으로, ‘우리 죄를’→ ‘우리 죄로’,

‘내 주만’→ ‘나 주만’ 으로, ‘하도다’→‘합니다’ 로.

여기서 살펴본 대로 바꾼 가사들은 그냥 두어도 아무 관계없는 것이다. ‘내’를 ‘나’로 바꾼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그 가사가 그 부분에서 의미 전달에 장애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두는 것이 지금 이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는 이 세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4절 마지막의 ‘하도다’ 는 ‘합니다’ 로 바꾸었는데, 왜 5절 마지막의 ‘하도다’ 는 그냥 두었을까? 이것도 역시 그냥 두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을 이렇게 고쳐 놓았다.

 

2)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이 찬송가는 7군데를 수정했다. ‘내가 또’→ ‘나 또한’ 으로, ‘사랑이’→ ‘이름이’ 로, ‘날 구해 주시려’→ ‘날 구원하시려’ 로, ‘주 예수’→ ‘주 나를’ 로, ‘우리는’→ ‘그 사랑’ 으로 고쳤다. 살펴본 대로 이 찬송가도 대부분 그냥 두어도 아무 관계없는 것을 성도적 공감도 무시하고 손질을 했다.

5절 둘째 단은 “주 예수 이렇게 사랑하니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까?“ 인 것을”주 나를 이렇게 사랑하니 그 사랑 어떻게 보답할까?“ 로 바꾸었다. ‘우리’를 ‘사랑’으로 고친 것이다. 이렇게 고치고 나니까, 한 소절 안에서 바로 앞에 나오는 ’사랑‘과 고친 부분의 ’사랑‘이 연이어서 나오게 되었다.

“위원회 안에서 정말 치열하게 토론했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바로 이어지는 후렴에 ‘사랑’이 두 번 나온다. 그래서 5절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총 5번 말하게 되어 있다. 의미 중복을 줄여 나가야 할 판에 있던 것을 고쳐서 더 넣었으니 부르는 사람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고치고는 불러 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3)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이 곡은 4곳이 수정되었다. ‘나와 항상 같이 하여 주시고’→ ‘주님 항상 같이 하여 주시고’ 로 바뀌었다. 같이 해 주시는 ‘나’라는 대상을 빼버리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냥 두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전에 가사가 오히려 분명하게 의미가 전달된다고 할 수 있다.

 

4)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이 찬송은 복음 송에서 들어온 찬송이다. 우리는 이 복음 송이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로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바꾸었다. 이거나 저거나 별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존중해 주지 못했을까? 뭐가 다를 바가 있는가? 오히려 ‘하나님의 독생자’가 낯설어서가 아니라 전에 가사보다 더 어색하다고 할 수 있다.

 

5)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 찬송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 하나이다. 이 찬송가에서는 2곳을 수정했다. ‘화목제‘→ ’화목 제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잘 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측량 다 못하며‘→ ’측량 다 못하네‘로 바꾼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작업이었다. 앞부분의 가사에서 두 번이나 ’네‘로 끝나는 가사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렇게 바꾸어서 한 절 안에 3번이나 ’네‘가 들어가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고쳐서 오히려 못난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냥 두어도 아무 관계없는 이런 경우는 찬송가 전체에서 여러 군데 아주 많이 산재해 있다. 찬송가가 입에 익은 성도들이 가사를 보지 않고 그냥 부르면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변경된 것이 그냥 두어도 괜찮은 것을 손대어 고쳤기 때문에 불쾌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한 대로 ‘대폭 수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이렇게 한 것이 오히려 영양가 없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2. 뭔가 어색한 가사들

가사를 고친 뒤에 다듬지 않은 결과로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두 가지라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너무 많아서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잘 아는 주님’→ ‘아시는 주님’으로 변경했고,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늘 보호해 주실 것을’으로 바꾸었다. ‘돌보아 준다’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보호’라는 한자어로 바꾸어 버렸다. 만약 전에 가사가 이렇다면 그것을 순수 우리말로 되살려 놓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것을 어쩌면 좋은가?

 

2)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큰 바위 밑 안전한 그곳으로’로 바꾸었다. '샘솟는'을 ‘안전한’으로 바꾼 것이다. 산속에서 물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고 감사한가? 샘솟는 물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곳이 더 안전한 곳이 되는데, 그만 샘물을 빼버리고 말았다.

 

3)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주의 사랑의 줄로’→ ‘주의 사랑 줄로써’로 바꾸었다. ‘사랑의 줄’이라는 말을 잘 안 쓰는 단어라 생각하고 이렇게 바꾼듯하다. 그러나 ‘사랑의 줄’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나오는 말이다. 호세아 11장 4절을 보라. 사랑 줄이 아니고 사랑의 줄이다. 그런데 왜 잘 되어 있는 것을 이렇게 바꾸었을까?

 

4)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이 길 따라서 살 길을 온 세계에 전하세’를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로 바꾸었다. ‘살기를’ 어떻게 전할 수 있나? 이 부분을 부를 때 ‘살 길’을 ‘살기를’로 잘 못 적은 ‘오자’인 줄 알았다. 뭔가 어색하여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다.

 

5) 471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전에 가사는 ‘주여 당신 뜻이라면 나를 고쳐 주소서’인데, ‘나의 주님 뜻이라면 나를 고쳐 주소서’로 바꾸었다. 개정된 가사로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가 아프게 된 것이 주님의 뜻이란 말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주님 뜻이라면’에 이어서 그 뒤에 바로 ‘나를 고쳐 주소서’ 가 이어져서 ‘나’가 두 번이나 이어져서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전에 가사 대로 그냥 두었으면 좋을 뻔 했고, 만약 고친다면 뒤에 따라 나오는 단어를 생각하여 다른 말로 고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나오는 어색한 변경은 아래와 같다.

‘게을러서’→‘게으르게’(495.→①), ‘축복의 산’→ ‘복 주실 산’(482.①) 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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