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백년을 맞으면서 고난의 복음을 회복하자!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 연구위원장, 미포 사무총장)

요한 3서 2절은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 때문에 널리 알려진 본문이다. 영혼 구원을 기반으로, 범사의 형통, 건강 축복으로 설명된다.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편지 초두에 덕담을 나누는 인사말을 가지고 삼박자 구원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치부한다. 그러나 주해적으로 이 본문을 다루면서 논의한 것을 보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논박하기가 쉽지 않다. 요한 삼서 전체의 기록과 비교를 통해서 본문 2절이 가진 위치를 정리해 보자.

먼저 요한3서1:2절은 기원임과 동시에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당시 헬라 서신에 나오는 건강과 안부를 묻는 흔한 상투적 문안 구절이라고 주석들은 다룬다. 바울 서신이나 일반서신이나 처음에 안부를 묻는 방식이나 그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방식은 편지를 받는 대상자들의 현실이나 그들이 개선해야 할 과제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내가 간구하노라는(ευχομαι) 것은 기도가 분명하다. 따라서 기도는 단순한 형식의 문안을 넘어선다. 기도는 기도 대상자들의 상황과 과제와 연결된다. 특히 성경에서 기도는 나의 바람 혹은 인간적이고 욕구적인 바람과는 관계가 멀다. 주기도문이 말하듯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이다. 가이오와 그가 속한 교회에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사도 요한의 입장이 기도 속에 담기게 된다.

기도의 참된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기도문의 기도를 다룰 때 문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태는 산상수훈에서 다룬다.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잘못된 기도를 제시한다. 첫째는 유대인의 외식하는 기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며 인정을 받으려는 기도이다. 둘째는 이방인의 말을 많이 하는 기도이다. 둘 다 기도라는 신앙 행위가 철저하게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을 향한 기도, 인간의 탐욕을 요청하는 기도를 극복하고 참된 기도를 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크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과 이를 구현하는 용서(부채갚음)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인간적인 욕망과 바람을 넣은 자리가 없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공평과 의를 삶으로 담아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1:2절이 문안 인사이며 동시에 기도라고 할 때, 기도는 주기도문의 정신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뜻이 실천되는 삶을 그 문맥으로 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인간적인 기대만을 충족시키는 기도가 성경에 있는지를 찾아보라. 하나도 없다.

둘째 기도의 내용을 본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이것은 편지를 받는 가이오의 현재 상태이다. "네가 잘하고 있는 것처럼" 영혼이란 말이 영육을 구별하는 표시로 읽힐 필요는 없다. "너 자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너의 삶을 잘살고 있는 것처럼이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3~4절에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들음으로 판단한 것이다. 진리는 복음에 대한 대안적 표현이다(8, 12).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먼저 언급한 네 영혼이 잘됨을 기반으로 해서 네가 모든 일에 있어서 잘되고 건강하기를 사도 요한은 기도한다. 잘된다는 것과 건강하다는 것은 둘 다 부정사이다(ευοδουσθαι και υγιαινειν). 이 두 개의 부정사를 견인하는 것이 기도한다는 주동사이다(ευχομαι). 두 개의 부정사는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한다.

그런데 단순한 상투적 인사말만은 아니다. 현재 진리의 복음 안에서 잘 행하고 있는 것과 구별되게 모든 일에서 네가 잘하기를 바라는 것이 첫째 기도의 내용이다. 둘째는 건강하라는 안부로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잘못된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건강성을 말하는 의미도 있다. 소위 목회 서신에 자주 나타나는 바른 교훈이나 말(딤전1:10, 6:3, 딤후1:13, 4:3, 딛1:9, 13, 2:1-2)을 의미한다. 건전한 교훈이다. 잘못된 것으로부터 벗어난 건전하고 바른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기도의 내용과 문맥의 상관성

이런 해석을 요한3서 전체의 내용과 비교해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5~8절은 자비량해서(7)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일을 제시한다. 6절에서 그들을 잘 대접하여서 보내주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잘하는 것(καλως ποιησεις)은 실제로 앞서 2절의 잘되는 것과(ευοδουσθαι)는 병행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기에 의미상 차이가 없다.

그리고 9-11절은 교만한 디오드레베를 고발하고 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이고(9), 사도 일행을 비방하고, 나그네 된 순회 전도자들인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않는(10) 악한 자다(1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는 말은(μη μιμου το κακον) 바로 건강하라는 단어가 말하는 바이다.

결론

요한3서 2절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요한 3서의 기록 목적과 내용을 염두에 둔 사도 요한의 서론적 기도이다. 그는 가이오가 현재 복음의 진리를 잘 받고 행하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네 영혼이 잘됨 같이), 이제 다른 일 즉 자비량하는 순회 전도자들을 잘 영접하고 전송하는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잘하고(네가 잘되고), 디오드레베와 같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를 본받지 않는 건강하고 바름이 있기를(네가 강건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적 결론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서 이 본문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 될 수 있을까? 신약 본문 어디에서 네가 돈을 많이 벌라고 가르치고 출세하라고 가르치는 본문이 있는가? 네가 건강도 돌보라는 말은 하지만 건강이 목적이 되어서 간구의 내용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디 한 본문이라도 있는가? 기회가 되면 구약 본문의 축복이 가진 의미를 신약에서 적용하는 방식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요한 3서 2절에 대한 시론적 성격의 글을 제시해본다. 함께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올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미래교회포럼과 함께 작년 한 해를 삼일운동을 대하는 기독교적 성격을 살폈다. 그때 1% 정도 되는 소수의 기독교인이 한국사회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통의 장정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개별적 신앙의 결단이었다. 당시의 신앙은 오늘날과 같은 기복적 신앙과 성공지향적인 신앙이 아니었다.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이 복으로 여겨지는 순교적, 종말적 신앙이었다. 희생과 섬김 그리고 고난을 복음의 증거로 보았다.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지 않아도 물질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성경이 오히려 경계하는 것을 복음이 주는 희망인 것 처럼 가르치는 가르침과 설교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른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극복하는 희생적 신앙, 복음과 함께 고난받는 신앙의 정수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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