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서 목사 (큰사랑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

보통 한 나라의 안정은 ‘안보’, ‘경제’, 그리고 ‘국민의 성숙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건국 이래 70년 동안 안보와 경제는 세계 10위권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문제는 국민의 성숙도다. 과연 성숙한 국민일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사상누각(砂上樓閣)은 아닐까? 기분 나쁠지 모르나 이성보다 감정에 쉽게 기울어지는 이 민족의 촛불 노예근성은 법치를 잃게 했고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근본 체제마저 위태하게 만든 결과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최고 대학진학률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 중 하나다. 이유는 동성애, 이슬람, 급진 페미니즘 등을 앞세운 서구의 PC(political correctness)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종북 세력의 위협이라는 두 위협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봐도 성한 곳이 없다. 좌파 정부의 어설픈 광대 짓에 이 나라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다. 경제와 안보의 위급함은 설명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좌파 정권이 언론을 동원하여 선전선동으로 덮어보려 애써보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도 좌파 정권에 환호하는 쓸모있는 바보들이 적지 않음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환자들처럼 보인다.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

소련의 레닌은 이런 자발적 추종자들을 가리켜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 불렀다. 스스로 알아서 공산주의의 제물이 되어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다. 우리의 강남좌파도 그런 부류라 하겠다. 보통 한 나라가 공산화될 때 이런 이들이 일조를 한다. 하지만 웃기는 것은 공산화 이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숙청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과거 소련, 중국, 베트남, 북한 등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이 그러했다.

소련이 공산화된 후 스탈린은 전임 레닌 세대의 중요인물들을 전부 숙청했다. 멕시코에 숨어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마저 찾아내 암살했다. 베트남은 어떨까? 베트남이 공산화된 후 공산화에 일조했던 좌파 지식인, 성직자, 정치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강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북한은 어떨까? 역시 동일하다. 김일성은 괴뢰정권을 세우자 소련파(허가이, 박창옥), 남로당파(박헌영), 연안파(김두봉, 최창익), 갑산파(박금철, 이효순)를 차례대로 숙청했다. 좌익의 거두요 골수 공산주의자인 박헌영도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총살했다. 숙청의 목적이 권력의 독점에 있겠지만, 한번 ‘자유’의 맛을 본 이들은 공산정권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들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쓸모있는 바보들’은 줄을 서 있다. 그들의 말로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죽음의 불로 날아든다. 서구세계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뉴욕타임스의 월터 듀란티(Walter Duranty),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 Bernard Shaw),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그리고 구조주의 학자들이 대표적인 쓸모있는 바보들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거짓, 음란, 파괴의 속성을 지닌 무신론적 인본주의인 공산주의는 ‘네오맑시즘’, ‘신좌파’라는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고, ‘성혁명’, ‘헤게모니 이론’, ‘문화 맑시즘’이라는 깃발을 흔들며 인간의 영혼을 지속적으로 파괴해왔다. 거짓을 위한 쓸모있는 바보들의 광기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바보들의 세상’을 만들려는 좌익의 오랜 숙원

지금 이 나라에는 쓸모있는 바보들이 없을까? 안타깝지만 너무 많은 것 같다. 이유는 국민 대다수가 역사왜곡의 피해자이자 좌익의 홍위병으로 이용당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목회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좌경화라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좌익은 지난 30년 동안 왜곡된 역사교육에 공을 들여왔다. 필자도 그 피해자였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필자는 최근 모나 채런의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과 주사파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쓴 <쓸모있는 바보들의 거짓말>이라는 책을 살펴보려 했다. 안타깝게 두 책 모두 절판이라 국회도서관을 이용해야만 했다. 도서신청을 해보니 <쓸모있는 바보들의 거짓말>은 열람제한도서였다. ‘왜 열람제한을?’ 할 수 없이 어렵게 구해 읽어보니 이 책은 좌익의 역사조작을 고발한 책이었다. 읽는 내내 ‘모두가 속았구나’와 ‘그동안 우익은 뭘 하고 있던 거지?’라는 우익의 무능에 화가 났다.

책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1) 6.25전쟁의 책임은 미군으로 김일성의 남침은 찬양받아야 한다. (2) 이승복은 허구의 인물이요 ‘이승복 신화론’은 조작된 소설이다. (3)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배후 조정자는 미국으로 과잉진압과 신군부 집권의 전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4)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북한공작원이 아니며 국가기관에 의해 조작되었다. (5) 민혁당 사건은 과거사 조작이다. (6) 한미행정협정은 불평등협정이다. (7) 여중생 효순, 미순은 미군이 의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8)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다. (9)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다. (10) 박정희의 경제발전은 수탈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11) 북한인권문제는 미국의 음모이니 침묵하라. (12) 탈북자의 증언은 거짓말이다...” 하나같이 그동안 북한이 주장해왔던 반미선전과 이미 증명된 사실을 왜곡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현 좌파정권이 열람제한을 한 이유가 짐작되었다. 필자는 도서까지 통제하는 현 정권의 철저함에 놀랐다. 이런 책도 통제하는데 다른 영역은 오죽할까? 그동안 국민들은 사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사실처럼 왜곡한 좌익의 장난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명백한 사실도 거부하는 바보들로 변해간 것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상황은 더 심각하다.

좌익의 홍위병 노릇은 이제 그만

우리는 더 이상 좌익에 놀아나는 쓸모있는 바보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누가 쓸모있는 바보들인가? 예를 들면, 동성애를 반대한다면서 좌파의 PC를 충성스럽게 실천하는 정권에 박수를 보낸다거나, 달콤한 거짓평화에 환호성을 지르는 경우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좌경화? 어떻게 유신론적 신본주의자가 무신론적 인본주의인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 있나? 이해되지 않지만 현실이다. 심지어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미련한 마술에까지 걸려 있다. 영국을 포함한 서구교회가 이 마술에 젖어 그 원칙에 충성하다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칫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현 정권은 상식적인 하나님의 창조원리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근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를 통과시킨 NAP(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가 대표적인 경우다. NAP 안에는 차별금지법 제정, 성평등(gender equality) 정책, 이단포교와 군전력 약화를 가져올 군대체 복무, 무슬림 난민과 불법체류자와 관계된 다문화정책, 다음세대의 가치관을 왜곡시킬 학생인권조례 등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할 내용들로 가득한 악마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런데 이런 것에 박수치는 그리스도인의 멘탈은 무엇인가? 사실 NAP는 서구 사회주의자들의 행동매뉴얼인 ‘족자카르타 원칙’(The Yogyacarta Principles)의 한국판이다. 교회가 이 매뉴얼만 잘 숙지하고 있어도 좌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음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한다고 했을 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그 관심과 열정의 반만 보여도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애써 회피하며 다른 세계 속에만 안주하려 한다. ‘이것 큰일이다’라고 느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 시대를 여는 지혜로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이유는 그 능력은 세상에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은 더욱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세속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된다. 지도자가 방황하면 성도들은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의 지도를 받는가? 그래서 지도자들은 시대를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이제 쓸모있는 바보들의 행진을 멈출 때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 분명히 서 있는 가운데, (1) 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좌우 역사책을 비교하며 사실(fact) 중심의 객관적인 역사만이라도 살펴보자. 그러면 좌익이 그동안 역사를 얼마나 왜곡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역사관이 있어야 시대를 변화시키는 용기도 발현되는 것이다. (2) 성경적 경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비성경적인 병든 신앙에 있다. 사람의 변화는 거듭나야 가능하지만, 거듭나도 복음에 기초한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내 세속화되기 쉽다(딤전 4:5). 그래서 복음을 체험하고 그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은혜도 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좌익에 실컷 이용당하고 폐기되는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 되는 것만큼 허망하고 비참한 것이 있겠는가! 지금은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이 요구되고, 그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 리더를 필요로 하는 시대다. 누가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을 가진 이 시대의 지혜자들이다. 이제 다시는 쓸모있는 바보들의 행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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