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구 목사(예장고신 강원노회)

고신교단의 어느 노회에서 소속교회가 어느 목사 두 분의 이단성을 살펴달라고 청원한 건에 대해 비판적인 설왕설래가 많은 것 같다.

그런 비난 중에 솔직히 한심한 반응은 양비론적인 비난들이다. 속된 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꾸짖는 꼴”이란 듯 반발하는 모습들이다. 그렇지만 매사 그런 식이면 법이나 질서는 무의미해진다. 모두 다 자기 소위에 좋은 대로 사사기적 준거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악한 정부도 무정부보다는 낫다고 한다. 그렇다. 가령 고신교단이 가장 타락한 교단이라 하더라도 그 교단이 어떤 의무도 방기한 채 지역 교회들의 청원들에 무관심하기를 바라는가?

너무 가볍게 말들을 하신다. 심지어 노회가 특정 목사를 이단이라고 단정한 듯이 발끈한다. 오히려 특정인이 사감을 갖고 그리 예단하는 것이야말로 주제넘은 태도가 아니겠는가?

대개 장로교 정치에서 노회는 관할 교회 중에서 특정인이나 특정 활동들에 대해 그것의 이단성 여부를 살펴달라고 청원하면 그 필요를 살펴서 신학부에 그 안건을 검토하도록 배당을 한다. 그러고 나서 노회 신학부가 그 안건을 살펴서 청원을 ‘받고’ ‘안 받고’의 여부를 본회에 요청한다.

이처럼 노회는 청원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지도 않거니와 특정인이나 특정 행위에 대해 이단이라는 심증을 미리 예단하지도 않는다. 장로교정치가 원래 그런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노회 신학부는 보고를 받은 후 본 노회에 보고하고, 노회는 그 보고를 검토해서 총회에 청원할지 말지를 가부간에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총회에 안건이 올라가면 총회는 그 청원을 살펴 받을지 말지에 대해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총회는 노회의 청원 건 자체도 살펴본다. 가령 어느 노회가 '특정인의 이단성 여부에 대해 판단해주기'를 청원했더라도 그 표현이 과하다고 여겨지면 '특정인의 신학적 건전성 여부'를 살피도록 수정 채택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총회가 그 청원을 받기로 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결의로 특정인이나 특정 활동이 이단적인가를 예단하지 않는다. 대개 총회는 교단신학대학원에 그 청원에 제기된 문제의 이단성 여부를 연구하게 위촉한다. 대개 그 기간은 일 년이고 그 후 총회에 보고된 내용을 살펴서 재검토를 요청하거나 반려하거나 한다.

노회가 청원했다고 하더라도 채택되지 않으면 기각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심지어 3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그만큼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단성 여부를 심사한다고 해서 이단판정을 내리는 건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대개는 불건전 교리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교류를 금지하는 정도로 판단한다.

현대는 아노미적 혼돈의 세계이다. 익명성은 극대화되었고 준거들의 틀은 너무나 완만해졌다. 누구라도 일방적인 도발을 하는 것을 쉽사리 본다. 교단의 정치와 제도와 질서가 제각기 다른데 자신들의 준거가 절대적인 듯이 도발한다. 숫제 장로교신앙 자체를 부정하고 일방적으로 다투기에 대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적어도 장로교 목사라면 장로교 목사로서의 분수 곧 자기 정체성 안에서 공회를 거론함이 옳다고 본다. 장로교 목사는 그 개인의 경건이나 분별이 공회의 판단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공회가 무오류한 것은 아니다. 그럴지라도 장로교 교인이면서 공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장로교신앙을 뛰어넘는 오지랖일 뿐이다.

깊은 혼돈의 시대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오늘날 공교회의 공회는 더욱 분별의 사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적 교회가 걸어온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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