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미포 제3차 준비모임에서

김승태 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 소장, 3.1운동과 한국 기독교인

김승태 소장(중앙)이 발제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2일 은혜샘물교회 새가족실에서 열린 2018 미래교회포럼(대표 박은조 목사)을 위한 제3차 준비모임에서 김승태 소장이 발제한 글이다.

 

3.1운동과 한국 기독교인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1.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019년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정부 기관들은 물론, 사회 각 단체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 추진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계에서도 교단별로, 또는 연합으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3년 전부터 온누리교회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3.1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3.1운동과 기독교』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3.1운동에 관한 언론보도기사, 기독교인들에 대한 재판 판결문, 선교사들이 남긴 영문 보고서 편지 등이 번역되어 실릴 것이다. 또한 학회를 중심으로 올해 11월 기념 심포지엄과 내년 3월 논문집 발간도 준비하고 있다.

꼭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매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3월 1일에 앞선 주일을 3.1절 기념주일로 지켜왔다. 그러면 왜 우리가 3.1운동을 기념해야 하며,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가. 특별히 한국교회는 왜 3.1운동을 기념해야 하며,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 중국, 일본, 미주, 하와이, 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더라도 1500여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은 20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인구가 1천 800만에서 2천만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하게 되었다. 3.1운동이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3.1혁명에서 추구하였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혁명의 이념 내지 3.1정신은 크게 3가지다. 자주독립(自主獨立), 정의인도(正義人道), 평등평화(平等平和)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 후 제헌헌법 전문(前文)에서도 3.1운동을 언급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로 나서고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큰 기여를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그렇게 큰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을까?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달랐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신앙의 성격이고, 둘째는 축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私事化)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띠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 공공의 선(善)을 위해서는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하였다. 그리고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과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우리가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앙전통을 회복하고 이어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현대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신앙이 사사화(개인주의화, 개교회주의화)되고,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축복관(세속적 축복관)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 있다.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은 한국교회가 민주화, 사회정의, 평화통일 등 3.1정신의 구현에 앞장서고,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과 축복관을 회복하고 이어받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 동기

성경에서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가 위대한 애국애족자들이었다. 구약의 모세와 에스더가 그렇고, 신약의 사도 바울이 그렇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려 하였을 때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에스더는 자기의 동족을 구하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가 동족을 구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잘 못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사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인 결단에 의해서 참여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장로와 신석구 목사의 예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2월 서울과 평안도를 왕래하며 3.1운동 거사 준비를 하던 이승훈 장로가 2월 중순경 평양에서 몇몇 목사님들을 모아 놓고 거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자 그 가운데 몇몇은 일제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훈 선생은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하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일본이 오랜 옛날 한국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가 있느냐?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일뿐 아니라 튼튼한 이웃을 옆에 갖는 일본 자신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신석구 목사님은 1918년 11월부터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다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그 때의 일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오화영 목사가 1919년 2월 12, 3일경에 만나 나보고 말하기를 모모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천도교측과 연합코저 하니 거기 참가하겠느냐 하는데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지 아니하고 좀 생각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아니하였다. 예수 말씀하기시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 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 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어느 형제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떤 선생님께 말한 즉 그 선생님 말씀이 시기상조라 합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함이 아니오 독립을 심으려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 날 모두가 곧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는 날인데 마침 오화영 목사를 만나 나의 뜻을 표명하고 곧 참가하였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적 결단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의 씨를 심으려 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제 검사의 "장래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일로 5개월간의 독방생활을 포함하여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3.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역할과 수난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3.1운동은 기독교인, 천도교인, 불교인 등 종교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천도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초기 조직화단계의 7개 계열 가운데 6개 계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독립선언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조직화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전국교회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으며, 그 평가는 별도로 하고라도 해방 후 기초자인 최남선이 고백한대로 3·1독립선언의 이념도 기독교에 영향받은 바가 컸다.

3·1독립선언을 종교인들이 주도하였던 만큼 운동 전개과정에서도 종교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1919년 6월에 보고 된 일제 헌병대의 한 보고서를 분석해 보면 전국 13도 중 충청남북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천도교.불교 등 종교인들이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경기도는 기독교.천도교.불교가 연합하였고, 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평안남북도.함경북도는 기독교가 주동하고 천도교가 협력하였으며, 강원도와 함경남도는 천도교가 주동하고 기독교가 협력하였고, 불교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북도에서 협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기독교인이 시위를 주도한 사례와 참여 방법을 몇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의 경우 지방시위를 주도하기 위하여 서울의 선언식에는 불참하였지만, 의주지역의 김창건 목사, 김이순 전도사, 안석응, 김두칠 등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일 의주서부교회당 공터에 7,8백여 명을 모아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당하였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도 이일영, 김이제 강규찬 목사, 정일선 전도사등과 함께 평양에 있는 6교회가 연합하여 선언식과 시위를 계획하고 3월 1일 숭덕학교 운동장에 약 1천 수백 여명을 회집시켜 김선두 목사 사회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사회자로서 “구속되어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뜻의 연설을 하여 군중들을 열광케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그 해 장로회 총회가 열리는 10월까지도 복역중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부회장 마펫이 총회를 주재하였다.

노회의 임원들이 기독교 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을 동원하여 3.1운동에 참여한 사례로는 경북노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당시 노회장이던 정재순 목사와 노회 서기이던 이만집 목사 등은 3월 8일 대구 장날을 기하여 교인들과 계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독립만세라고 쓰인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시기인데 각자가 그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하여 이에 호응한 7,8백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공주에서도 공주읍교회 감리교 목사 현석칠이 영명학교 교사,학생들을 포섭하여 4월 1일 공주 장날을 이용한 시위를 계획하여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이와 같이 교역자들 뿐만이 아니라 의식 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시위를 벌인 경우도 적잖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강화군의 시위이다. 이 시위는 은세공을 하던 유봉진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일으킨 것으로 시위 참여 인원이 1만명을 상회하였다. 물론 평화적인 만세시위이긴 하였으나, 시위 도중 피해자가 생기자 경찰서에 몰려가 피체자를 구하고 다시 군청에 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 시위가 대규모로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교회조직을 통한 치밀한 연락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 사례는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운동 방법에 의한 참여 사례를 두 가지만 더 들어 보자. 이 운동의 초기에 해당하는 1919년 3월 3일경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이 뿌려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 지며, 신자는 매일 세 때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이는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할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기독교측의 비폭력 주장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나 피억압자가 억압자에 대해서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고 하는 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대단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맨손이었던 우리 민족으로서 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1919년 12월 일본정부의 비공식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한 여운형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완전한 독립이 보장되기 전에는 일본과 타협도 협상도 할 수 없다...우리는 무기도 없고, 무방비 상태이지만 우리의 명분은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떤 방법의 억압을 받아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현 임시정부를 설립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주요 원칙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명분에 대한 신념은 위대한 것이며, 여기에 우리의 신뢰가 담겨있다.”

아무튼 이 통고문이 제시한 성경본문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주려고 하였던 함의(含意)는 무엇이었을까 ? 이를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을 읽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처신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자료가 3.1운동 초기 성경말씀에 대한 것이라면, 다음 자료는 후기에 나온 기도제목에 대한 것이다. 1919년 11월 28일자 평남도지사의 보고에, 10월 19일자로 상해에서 평양에 사는 장로회신학교 생도 박종은 집으로 보내온 소위 ‘불온인쇄물’을 평양경찰서에서 압수하였는데, 그 속에 ‘한국내 예수교회 기도 제목’이 들어있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평양 및 안주 기타 각 교회에서 수감자 및 그 유족을 위한 기도를 비롯하여 다른 몇몇 항목을 지정하여 기도시킨 일이 있었다고 하며, 그 요일별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요일별로 교회와 독립운동단체, 민족 단결, 독립운동가 유족, 자유 독립, 국제연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되, “각 신도에게 이 일정을 지시하여 기도를 시작하게 하고 매주간 항상 계속하여 진행시켜 줄 것을 바람. 단 시국의 추이에 따라 어떤 제목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면 변경 추후 전달하기로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으로,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점이 다음에서 살펴보듯이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하였던 기독교 세력이 지도적 총피검자의 17.6%나 차지하게 하였던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초기 조직화 단계의 거의 모든 흐름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으로 관여하였으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조직이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이 그처럼 신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평안북도를 위시하여 경상도. 함경도. 전라남도 등 거의 모든 지역의 최초 독립선언식과 시위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기독교는 평신도들을 포함한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들까지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주동하였으므로, 일제의 주목을 받아 그 핍박과 피해도 매우 컸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을 헌병.경찰과 군대까지 동원, 증파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상살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당시의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탄압지시 전보는 표리부동한 그들의 기만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번 소요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한다. 3월 11일.”

이러한 기만적 탄압정책과 함께 자행된 일제의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당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더라도 평남 강서 사천의 학살 사건(3월 3일), 정주의 학살, 방화 사건(3월4일-4월2일), 의주의 교회당 방화 파괴 사건(3월 하순경), 천안 병천의 학살사건(4월 1일),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4월 15일) 등이 있다.

또한 교회는 3.1운동 참여로 인한 교역자들의 피체 투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장로교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평양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복역중이었기 때문에, 그 해 장로회 제8회 총회의 회장 직무를 부회장이던 마펫에게 위임하였다. 이 총회에서 보고된 장로교의 피해는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체포된 자: 3,804 ;체포된 목사: 134 ;기타 기독교 관계지도자로 체포된자: 202; 감금된 남자 신자: 2,125 ; 감금된 여자 신자: 531 ; 매맞고 방면된 자:2,162 ; 사살된 자 :41 ; 현재 수감중인 자:1,642 ; 매맞고 죽은 자:6 ; 파괴된 교회당:12

이러한 교회의 피해 상황은 감리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제20회 감리교 연회에서 평양지방 감리사 무어가 “본 지방회를 개회하려고 할 시에 조선목사 중 1인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하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야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권사, 속장,학교교사, 주일학교 교사 합수가 160인이라. 3월1일에 이 운동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기 영향이 있다... 본래 목사의 수가 28인인데 길 중 14인은 금고되고, 4인은 퇴직하다...고로 남은 이가 불과 10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그 지역 감리교 목사의 과반수가 체포 구금되었던 것이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직업적 종교인, 즉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구한말부터 여성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총인구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1운동과 관련된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이들이 대부분 과격행위자이기보다는 시위주동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의 정도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가 1,705개소, 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 472개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만 합하더라도 교회가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 숫자는 3.1운동의 피해로 전해에 비해 교회는 88개소, 신자는 무려 22,409명이나 줄어든 것이었다. 여기에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한다면 교회의 피해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몇몇 실례를 들어가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한 동기와 역할을 살펴보았다. 이들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 동기는 정신구조적으로 민족적 양심에 영향받은 측면과 종교적 신앙심에 영향받은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즉 민족 성원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3.1운동에 참여한 면과 종교적 양심 내지는 애국 애족적 신앙심 때문에 3.1운동에 참여한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외세에 의해 억압을 받는 민족의 성원이었으므로 이 두 측면은 모두 중요한 것이다. 더욱이 당시에 일제가 폭압적 식민통치를 하면서 종교의 자유까지 억압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이 두 측면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해를 같이하는 것으로, 상보적 관계에서 상승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적 신앙심이 깊었기에 민족의식이 강하였고, 민족의식이 강하였기에 보다 신앙심이 깊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환난 속에서 연단된 신앙이 내외적 기회가 도래하였을 때, 밖으로 표출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신앙적 결단 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이를 주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어 기여하였던 것으로, 기독교인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방 독립을 바래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후의 그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을 이들의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그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나를 실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3.1운동 당시에는 비록 소수집단이었지만,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걱정하였는데, 지금은 다수 주류집단이 되었으면서도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사사화 개인주의화되고, 그들이 가진 축복관이 세상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3.1운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하였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이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정신사적으로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도 미완성인 운동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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