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편집인)

최근 한국교육평가원이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 집필 기준 시안에 대한 연구보고를 교육부에 제출하면서 그 동안 써왔던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만 넣도록 교육부에 건의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평가원은 2011년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서술한 이후 학계와 교육계에서 수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현격한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일까?

평가원 설명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그냥 민주주의라고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기 보다는 민주주의라고 해도 그 의미가 통하고 문제가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까? 자유민주주의를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굳이 그것을 민주주의로 고치려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필자 만의 기우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참에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보아야 한다.

 

창세 이후 중세까지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이어 하와를 지어 아담의 배필로 짝지어 주셨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어떤 지배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뒤 하나님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인 가정에 질서를 주셨는데, 창3:16 말씀이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 질서는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고전 11:3절이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점차 인구가 불어나고 따라서 가정이 많아져 부족사회를 이루었을 때는 족장이 그 부족을 이끄는 리더십이 되었다. 이스라엘도 사사 시절 사무엘이 늙고 리더십이 약화되었을 때, 백성들은 왕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사무엘은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의 고민어린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삼상7:7) 그리고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신다. 물론 당시의 많은 나라들이 왕의 제도에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왕정정치는 중세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드디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왕권에 대한 회의(懷疑)와 함께 나라를 통치하는 권력 구조에 대해 논의가 시작된다. 감히 왕과 귀족들의 정치권력에 대항해 백성들이 주권을 가지는 정치구도의 변화를 이루어 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당시 군주정치의 합리론은 광범위하게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백성들의 끊임없는 변덕, 완성되지 못한 인격을 가진 인간의 파괴적인 충동, 그것을 억제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과 힘이 없는 평민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또한 왕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며, 하나님이 권력을 주셨다고 믿는 이들은 왕정정치를 끝내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세상의 일은 인간의 이성,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였다.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폭력성이나 죄의 문제는 모두가 동의하여 순종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시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자유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부의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프랑스의 자유주의는 국민의 일부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기에 실패했지만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원형이 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차이

자유민주주의가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이 있어왔다. 자유주의의 이념은 (특히 고전주의적 자유주의에서) 고도로 개인주의적이고 개인과 정부와의 관계에서 정부의 힘을 제한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고 보면 반대로 민주주의는 다수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원리로서 집단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국 둘이 타협을 해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적 집단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만들어 낸 것이다. 개인의 양심에 따른 자유가 우선이냐, 아니면 공공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다수가 우선이냐의 다툼이 양심의 자유와 다수의 결정과의 조합을 이루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버리자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민주주의면 뜻이 다 통하는 것일까? 다른 숨은 의도는 없는 것일까? 필자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자유라는 말이 개인의 양심을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역설한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근본적인 인간성이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관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거역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이다. 이를 뭉개고 그냥 민주주의로 나아간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그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인격체로 보기 보다는 물질로 보았기 때문에 다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권력을 쥐는 민주주의를 선호하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받아 들였던 나라들도 민주주의를 말한다. 북한의 국호는 정확하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투표를 한다. 그래서 다수결이 결정된다. 하지만 찬성만 하지 반대를 할 수 없다. 자유롭게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대 표를 던질 수 있는 자유가 없다. 그랬다가는 반동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정죄할 때, 다수가 결정하면 그가 옳든 그르든 그는 반역자가 된다. 그것이 그들의 민주주의이다. 집단주의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참으로 중요한 단어이다. 그것을 빼자는 발상은 참으로 대단한 위험을 자초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근본은 양심의 자유이고 그 양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는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고 그것에 대해 피를 흘리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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