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근 목사/제자들교회 담임/건강한교회연구소 연구원

목사가 된지 15년이 된 나에게 히브리어 헬라어는 애증의 연인이다. 말 그대로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신학교 수업 시간 중 가장 힘들었던 기억엔 어김없이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리고 없는 것으로 여길 수만은 없는 것이 설교자로써의 현실이다. 설교라는 것이 성경을 설명해야 하는데,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과정에 원어가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 연세 지긋한 담임 목사님이 설교 가운데 원어를 더듬더듬 읽으시며 설명하시던 모습이 있다. ‘교회는 원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밖으로라는 ‘에크’와 ‘부르다’라는 ‘칼레...오’가 합성된 것으로 ‘세상 밖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는다는 말에서 ‘권능’은 ‘뒤나미스’로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자주 틀리기도 하고, 자주 위험하기도 하다. 한 예능프로에서 한국에 처음 온 독일인들이 맥주를 마시며 한국인들이 이럴 때 무엇이라고 하는지 여행책자를 찾은 후 ‘갈채’라고 외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여행 책자에, Prost는 한국어로 ‘갈채’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설교의 현장에서도 이런 착오들은 비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원어가 신학생 때나 필요한 것이지 졸업한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객체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필요가 없어서 사용 안하는 것인지, 원어에 익숙지 않아서 그 필요성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실제로 원어를 사용할 줄 알면서 설교에 활용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하는 목사님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반성의 눈으로 신학 과정을 되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우리의 신학교육은 원어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도록 하지 못했다. 3년의 M.Div 커리큘럼은 원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에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겨우 2-3주의 계절학기 동안 집중해서 하나의 원어 코스를 지나간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원어 하나를 마스터할 수 있는 슈퍼 신학생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과정’이다보니 이후에 이를 활용할 실력을 갖추는 실효성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여파는 고스란히 교회 사역에서, 설교에서 그가 은퇴할 때 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설교자는 본문을 깊이 준비해서 설교하기보다 주석이나 설교집, 쉽게 접하는 설교 자료에 의존할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설교에서 본문을 다루는 비중이 적으니 예화로 설교의 빈 공간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설교 이외에 드라마를 넣기도 하고, 영상 자료를 활용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나 그 이유가, 우리가 ‘성경을, 원어를 잘 몰라서’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글 성경은 번역 성경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저주가 되기도 한다. 번역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즉 본문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쉬워졌다. 하지만 어떤 언어라도 번역되는 과정에서 전달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경우에 문장의 어순이나 단어의 뉘앙스, 파싱 정보 등을 포함한 많은 문법적 표지들이 번역되는 과정 중에 대부분 사라져버린다. 때로는 이 표지 중 하나가 본문 전체의 의미를 좌우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번역된 성경에서 주제와 대지를 잡고, 원어 성경을 통해 놓쳐버린 정보들을 살려 본문의 깊고 풍성한 의미를 채운다면 바르고 깊이 있는 설교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깃발만 꽂으면 교회가 된다던 시기가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작금의 시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설교자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교인들의 입에서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설교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럴 때 원어는 설교자를 평신도와 구별하여, 신학을 배운 설교자만 쓸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개혁주의의 스승이라 생각하는 칼빈 선생은 평생에 라틴어는 물론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했다. 그의 수업은 물론 경건회 설교도 원어를 읽고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풀어주는 내용이었다. 또한 현대 강해설교의 대가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 역시 강해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원어의 필요성과 유익성을 강조한다. 이는 제임스 스티징거, 메릴 F. 엉거 등도 동의하는 바이다. 원어를 알고 활용할수록 설교의 내용이 깊고 풍성해진다. 굳이 다양한 설교의 방식을 배우지 않아도 성경 하나로 설교가 가능하며, 당연히 그러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대언하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원어가 강단과 설교자를 위해 필요한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지금 한국 교회는 세속화의 문제와 이단들의 거친 공격에 마주 서 있다. 교인들이 목회자와 강단의 권위를 예전처럼 맹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교회로 파고드는 이단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을 지적하거나 수정할 도구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여기에 그동안 우리가 놓쳐버린 성경 원어의 필요성이 발생한다. 성경 원어는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우는데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청중은 성경 이야기에는 기대감 없을 수 있지만, 원어가 들려주는 깊은 문법적, 구문적 바탕에서 우러나는 교훈들에 신선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데 실제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다수의 이단이 원어를 무시하고 번역 성경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세우기에, 이런 교리들은 원어 앞에서 바로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원어가 교회와 성도를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이유가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 중세의 1,000년 불길을 맞서 종식시킨 선례를 남겼다. 그것은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힘,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열정의 외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오직 성경으로 강단의 권위를 회복하고 우리 앞에 이글거리는 영적 대적들을 맞서야 한다. 그것은 신학교 교수들의 사명이 아니라 지상 곳곳에서 영적 파수대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개교회 강단의 사명이며, 칼빈의 후예라 자처하는 모든 설교자의 사명이다.

강단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지역이 살아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신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성경을 아는 것이다. 번역본을 넘어 더 깊이 알고, 더 풍성히 아는 것이다. 본래 성경이 기록된 대로 받고, 이해하고, 전하는 강단이 회복될 때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주의의 기치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지키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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