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연대 주관, 한교총 주최. 2018년 3.1절 기념예배와 심포지엄에서 3·1절 99주년을 기념하며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평통연대)는 3.1절 99주년을 맞아 기념예배와 심포지엄을 지난 3월 1일(목) 오전 7시 종교교회(최이우 목사)당에서 가졌다. 이 글은 윤경로 교수가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윤경로(역사학자, 전 한성대 총장)

1. 3․1독립만세운동은 어떤 배경과 요인으로 촉발되었을까?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1919년 3월 1일 발발한 역사적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갑자기 서거했다. 57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평소 큰 지병도 없던 그가 갑자기 서거한 것이다. 따라서 민심이 매우 흉흉해졌다. 시중에는 황제가 독극물로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월 3일로 인산일(因山日)이 정해지자, 전국에서 조문객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일부에서는 “나라를 일본 놈에게 넘긴 자에게 무슨 조문이냐”는 반발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많은 조문객이 전국에서 상경했다. 인산일을 앞둔 2월 26일 남대문 역에 하차한 승객이 3,000여명이었고 27일에는 6,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인산일을 앞두고 상당한 인파가 전국에서 서울 장안으로 몰려 왔다. 그리고 ‘고종 황제 독살설’은 더욱 빠르고 넓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시중 민심이 흉흉했지만 이러한 민심을 대중적 운동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3․1거사’의 준비와 운동력은 국내가 아닌 국외, 곧 중국과 일본에서였다. 먼저 중국 상해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18년 8월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조동우 등 망명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제1차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식민지 처리문제를 논의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 파견준비를 서둘렀다. 이렇듯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 파견을 서둘렀던 것은 이 때 미국 윌슨대통령의 특사로 상해를 방문하고 있던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제공한 정보와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김규식 등 대표단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한 10여일 만이었다. 이에 고무된 대표단은 더욱 용기를 얻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을 시도했다. 대표단은 각국 대표들을 만나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반인륜적 무단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언론 및 외교활동을 펼쳤다. 파리강화회의 개최 목적이 1차대전 종전에 따른 식민지 처리문제였고 이에 대한 원칙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 원칙’을 천명했기에 이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는 1차대전 승전국들의 ‘잔치’였다. 이 회의는 베르샤유 겨울궁전에서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곧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440개 조항에 이르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4백여 조항이 넘는 체결내용에는 한국문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패전국 독일에 속한 일부 식민지에만 적용했을 뿐 승전국 일본과 프랑스 식민지에 속한 한국과 안남(越南) 그리고 영국에 속한 이집트 등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는 ‘국내문제’라는 이유로 불문에 부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베르사유조약’을 ‘베르사유의 배반’이라고 흔히 지칭한다.

이렇듯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베르사유조약’이 최종 결정된 것은 1919년 6월이었지만 파리강화회의의 이러한 분위기를 국내에서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그해 4월 초순부터였다. 미국 신문인 <크로니클>과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 등에 실린 내용이 국내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순경 국내에서는 한참 달아오른 3․1만세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중에 이러한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치솟는 시위 불길에 ‘찬물’을 붓는 소식이라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사를 실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대표적 친일어용신문이었기에 기사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시중의 바람이었고 여론이었다. 오히려 “전부 뒤집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거짓말만 쓰는 <매일신보>는 마음은 가리우고 겉으로만 보라. 할 수 있거든 도무지 보지 말라”는 경고문이 시중에 살포되기까지 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베르사유의 배반’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만세시위운동의 추동력은 점차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위운동에 참여한 일반 대중들의 만세시위 물결은 그해 말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이후 일제 당국이 만세시위대를 폭압적 방법으로 진압하자, 오히려 운동력은 더욱 고양되어 무력적 투쟁양상을 띠며 고양되었다. 말하자면 파리강화회의와 같은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하는 온건한 운동양상에서 보다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운동양탸가 변했던 것이다. 여기에 여러 비밀결사와 대중조직이 당시 시대사조의 하나인 사회주의사상 등과 접맥되면서 새로운 운동양태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중국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 그리고 일본 등 해외 한인동포 거주지역에서도 항일만세운동이 가열차게 추진되었다. 세계1차대전의 종언에 앞서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의 결과 동구유럽권 여러나라 예컨대, 체코슬로바키아, 항가리, 폴란드 등이 독립선언을 했다. 이 사실에 고무된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동포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1919년 2월 대조선독립단을 결성하고 박은식(朴殷植), 조소앙(趙素昻) 등이 기초한「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에는 “우리 해외독립군은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육탄전쟁(肉彈戰爭)’의 항일독립전쟁을 벌릴 것”을 선언하였다. 이와 거의 같은 때인 동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 또한「2․8독립선언」을 발표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주독립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비밀리에 국내에 전했다.

이무렵 국내에서도 일련의 ‘거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여운형(呂運亨)은 동시에 국내에 선우혁(鮮于爀)을 파견하여 이러한 움직임을 이승훈(李昇薰)을 대표로 한 국내 기독교계에 전달했다. 이들 양인은 1911-12년 <105인사건> 때 피의자로 고초를 함께 했던 남다른 동지관계였다. 이에 앞서 천도교측도 1919년 1월 20일경부터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인(崔麟) 등의 비밀모임 후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원칙, 곧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을 정하고 대표단 선정에 나섰다. 이 거사는 전 민족 구성원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하기에 민족대표는 당대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인사들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 때 추대에 오른 인사들은 구한말 대신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한규설(韓圭卨)과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으로 명성이 높았던 개화파 인물 박영효(朴泳孝) 그리고 구한말 대신 윤웅렬(尹雄烈)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개화 지식인으로 인정받던 윤치호(尹致昊)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추대하려한 교섭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이 하나같이 민족대표 자리를 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듯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 불교, 기독교계의 종교지도자들로 선정하게 된 배경에는 이상과 같은 이면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란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를 말한다. 한편 동경유학생들의「2․8독립선언」이 국내의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최린에게 전달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2월 20일경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은 다시 만나 거사일과 거사방법 및 이에 따른 준비절차 등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 그 결과 독립선언서 작성과 인쇄 등은 천도교측이 맡고 이를 서울과 지방으로 배포하는 업무는 기독교측이 맡기로 했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은 기독교측이 맡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이 각각 십수명씩 선정하기로 하고 불교측도 참가토록 했다. 말하자면 이 ‘거사’를 특정한 일부 종교계가 아닌 종교계 연합, 연대함으로 운동력의 외연을 좀더 확대하려했던 것이다. ‘3․1거사’의 민족대표로 선정된 33인이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종교지도자로 한정되었던 이유는 당시 국내 정치사회적 상황이 그만큼 열악했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러한 지도부 구성의 한계는 자연 ‘3․1거사’의 운동성과 운동력을 ‘나이브’하게한 원천적인 한계였다 할 것이다.

 

2. 시위첫날의 모습과 반응 그리고 민중들은 왜 나섰나?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 중 29명(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불참)이 태화관에 모여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이종일(李鍾一)이 낭독하고 이어 최린이 일제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의 사실을 통고했고 이들은 곧 경무총감부에 구속되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를 기다렸으나 이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바로 시가행진에 나섰다. 시가행진이 종로거리를 지나갈 때 이를 지켜보았던 윤치호(尹致昊)는 그날의 광경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거리를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지금의 종각 앞 사거리)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이 시위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김상태 역,『윤치호일기』(1916-1943), 77-78쪽; 윤경로,『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개정증보판, 434-435쪽).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는 윤치호의 소회는 당시 누구보다 국제적 역학관계와 일제의 통치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솔직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가 <105인사건> 이후 친일로 경도되기 시작했던 것도 ‘힘이 논리’ 앞에 굴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3․1거사’의 민족대표 추대를 고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를 포함한 국내 지도급 인사들의 당시 상황인식은 한마디로 독립 무망론(無望論) 혹은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이었다. 따라서 윤치호는 3․1만세운동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역사진행과 발전이 당시대 지식인들의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예언과 우려의 시대인식을 뛰어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3․1거사’ 역시 그러한 사례라 할 것이다. 윤치호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의 우려와 달리 3․1만세 시위의 열기와 운동력은 마른 들풀에 불을 댕기듯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급기야는 한국인이 거주하는 세계 각국 도처로 그 ‘불꽃’이 확산되어 피어올랐다. 그해 3월 초부터 5월 말까지 계속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수만도 일제측이 50명 이상 참가한 시위자로 제한해도 참가자가 연인원으로 200여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시위까지 합친 그해 말까지 진행된 시위참가자는 무려 1천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인구가 1천7백만 정도였다는 점과 어린이층을 제외한다면 당시 전체 국민 중 학생층을 비롯한 성인층 모두가 시위운동에 참여한 명실상부한 전 민족이 참여 궐기한 대한독립만세운동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당시 한인들 거의 전부가 만세운동과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죽음을 각오하며 시위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고종황제의 죽음이 당시 국민 전체를 그토록 분노토록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고종의 서거는 ‘3․1거사’의 발단과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 같이 당시 일제측이 비밀리에 조사한 여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나라를 팔아먹은 임금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없다’는 지방 유생층의 여론은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 할 것이다. 이 만세시위운동에 당시 백성 거의 전부가 참여했던 것은 일제의 반인륜적인 무력적 억압통치와 착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공유된 저항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일본의 ‘조선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 가시화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바로 이어 러시아를 중심한 3국간섭으로 그들이 목적한 바를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자 일본은 이후 10년을 준비하여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세계여론은 러시아라는 대국을 상대로 작은 섬나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무모한 짓으로 일본이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 달리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요인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9월 러일전쟁을 끝내도록 포츠머스강화회의가 조인된 것도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전쟁이 더 지속되었다면 결코 일본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던 전쟁이다. 러일전쟁을 ‘대리전쟁’, 곧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전쟁을 대신한 ‘대리전쟁’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아무튼 러일전쟁은 우리나라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완전 편입했다고 믿었던 일본이 러시아의 간섭(삼국간섭)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미국의 적극적인 재정적 후원 아래 10년간 준비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제국주의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는 대한제국 병탄을 가파르게 진행시켰다. 즉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협정을 강제하여 전쟁 중 한반도 내의 기지사용권을 확보하였으며 이어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1904/ 8/ 22)를 체결한 후 일본인 관리들이 대한제국의 외교, 군사, 재정권을 관장하는 이른바 ‘고문정치’를 획책하였다. 이로서 사실상 대한제국의 주권과 국권을 접수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가권력 일체가 일본측으로 넘어가자, 송병준(유신회), 이용구(진보회) 등 친일적 부류의 인사들은 재빠르게 일진회를 조직, 한일병합을 주장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반민족적인 행동에 나섰다. 친일파 조짐의 싹은 개항 이래 있어왔지만 노골적인 친일파 형성은 이때부터였다.

다른 한편 일제는 동시에 대외적인 작업에도 적극 나섰으니 대표적인 조치가 1905년 7월 미․일간에 맺은 이른바 카츠라 ․ 태프트밀약(桂太郞 ․ Taft Memorandum)이다. 그 밀약 내용인즉 “미국이 필리핀에서의 우위권을 갖는 것과 일본이 한국에서의 우위권을 갖는 것을 상호 인정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말하자면 향후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고 미국 또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묵인한다는 것을 양국 정부 사이에 비밀리에 묵계했던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한국지배를 인정받은 일제는 미국을 비롯해 기존에 한국에서 각종 이권을 갖고 있던 서구열강들의 이권, 예컨대 광산권, 선교활동권, 철도건설권 등을 보장해주는 조치를 취하였다. 일종의 ‘입막음’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후술하는 ‘을사늑약’ 늑결이 강제된 후 미국은 물론 서구열강 어느 한나라도 일본의 한국주권 침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치밀한’ 일제의 ‘입막음’ 조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된 것은 이상과 같은 ‘치밀한’ 사전조치 이후 결행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방적인 강제조치에 반발한 고종황제는 1907년 7월 일본의 ‘강도행위’를 국제사회에 호소할 목적에서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 3인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헤이그밀사사건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적지 않았다. 일제 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 및 사법 ․ 행정권 등 일체의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미늑약’을 강제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일제의 식민통치에 돌입한 것이다. 1910년 8월 22일(29일공포) “조선의 국권 일체를 영원하고도 완전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요지의 ‘한일합병’ 늑약이 늑결된 것은 이상과 같이 일제가 사전에 짜놓은 각본에 따른 조치에 불과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영원하고도 완전하게 강점한’ 일제는 우리나라를 일본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시켜 ‘식민지 조선(植民地 朝鮮)’이라 칭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총독에게 입법, 사법, 군사 및 치안, 행정권 등 통치의 전권을 강점했다. 그리고 통치방법은 무단통치(武斷統治)였다. 역대 총독으로 부임한 인물들이 예외 없이 군인출신이었다는 점도 이를 상징적으로 시사해준다. 1910년 8월 이후 전권을 장악한 일제의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에서 잘 드러난다.

헌병경찰제란 국내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과 전쟁에 대비한 군인을 구분없이 통치의 수단과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초대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밑에서 경찰사령관 겸 헌병사령관을 겸임했던 아카시(明石元二郞)는 훗날 조선에서의 무단통치를 ‘기포성산’(碁布星散)의 방법으로 통치했다고 ‘자랑’하였다. 말하자면 “바둑판에 바둑알 깔아놓듯 가을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 모양” 조선반도 전국 각지에 일본군대와 경찰 및 헌병들을 깔아 놓는 무단통치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을 통치했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같은 무단통치 아래 국내에서 구국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많은 반일 민족지사들이 해외로 망명길에 오른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3․1거사’ 때 민족대표 33인이 예외없이 종교인으로 제한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할 수 있다. 국내 남아있던 민족진영과 반일인사들에 대해서는 <105인사건>에서 보듯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조작된 사건을 만들어 사전 검속하는 방법 등으로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바는 앞서 보았듯 대외적으로는 법률에 의한 합법적인 통치를 가장하였으니 날조된 105인사건 역시 재판이라는 ‘합법적 도구’를 이용함으로 대외적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선전 고무하려했다.

그러나 공판과정에서 반인륜적인 고문이 자행된 사실과 이에 따른 허위진술이 ‘유일한 증거’였다는 사실 등이 드러나 ‘동양의 유일한 문명국’ 임을 선전 자랑하던 일제의 무단통치의 반문명성이 만천하에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일제의 무단통치는 1919년 ‘3월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로 통치술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앞서의 무단통치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교활한 식민통치가 획책되었을 뿐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일제의 국권강점 과정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주목해야 할 한 가지 대목이 있다. 일제측은 우리나라의 국권강점 과정에서 근대적 ‘합법장치’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각종 협약과 협정서 및 조약체결이라는 법률적 ‘도구’를 동원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정당성을 담보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는 점이다. 훗날 한국병합이 외압과 강압에 의한 강제행위였다는 주장에 대한 대비책을 이렇듯 법적 절차에 따른 ‘합법적’이며, 따라서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작금 한․일 양국 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측이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하는 저의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겠다.

 

3. ‘3․1절’은 ‘운동’인가 ‘혁명’인가 ?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개천절, 제헌절, 광복절 등과 함께 국경일의 하나로 ‘3․1절’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3․1절’이라는 명칭에는 ‘제헌절’이나 ‘광복절’과 같은 그날의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아 ‘3․1절’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여 매우 무미건조해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3․1운동’이라 지칭하고 있으나 이 역시 미흡하다는 지적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말하자면 3․1운동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좀더 부각시키고 제고(提高)하자는 대안의 하나로 ‘3․1혁명’으로 명명하자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 3․1운동 95주년 기념일을 앞둔 지난해 2월 26일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프레스센터에서 발족하고 이를 기념하는 ‘3․1혁명95주년기념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 학술회의의 주된 ‘화두’는 3․1절을 ‘운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혁명’으로 볼 것인가에 모아졌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이 주제 발표자는 ‘3․1혁명의 재인식’ 이라는 부제 하에 ‘운동인가 혁명인가’ 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잠시 함께 생각해보기로 한다.

1919년 ‘만세사건’ 당시 명칭은 ‘소요’ 혹은 ‘폭동’이었다. 마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를 ‘동학난’이라 불리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당대 지배층 혹은 기득권층에서 볼 때 그것은 ‘폭동’이고 ‘난’이었다. ‘동학난’이라는 용어가 사건 당시는 물론 일제시대를 거쳐 심지어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그렇게 불렸음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그만큼 치자(治者)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3․1운동’이라 불려온 것을 ‘3․1혁명’으로 그 의미를 보다 격상시켜보자는 주장에는 이러한 의도가 담겨있다 할 것이다. 역사적 용어로 ‘운동’이라하면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집단적인 움직임이 조직적이며 지속적으로 추진될 때 이를 운동이라 한다. 그리고 ‘운동’이라는 역사적 용어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투쟁’, ‘항쟁’, ‘혁명’이라는 의미에 비해 운동성과 역사성이 덜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 60여 년 간 ‘3․1운동’으로 불러왔기에 귀에도, 입에도, 눈에도 익숙한 것에 반해 ‘3․1혁명’이라는 용어는 생경스럽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학은 해석학이다’라는 말이 있듯 역사적 사실(facts))은 변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앞서 언급한 ‘동학난’이 ‘동학농민혁명’으로 그 의미와 해석이 달라지듯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작금에 ‘3․1운동’을 ‘3․1혁명’으로 높여 보자는 움직임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3․1운동’을 지칭하는 명칭은 수차 바뀌었다. 사건 당시 ‘소요’, ‘폭동’에서 ‘운동’과 ‘혁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가 진영에서였다. 1920년대 말 1930년대까지는 ‘3․1운동’과 ‘3․1혁명(운동)’이라는 명칭이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1930년대 말 정확하게 말해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이후 보다 본격적인 독립전쟁과 혁명적 분위기가 전개되면서 ‘3․1운동’에 대한 인식도 고무되어 이후로는 이를 프랑스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운동에 비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혁명’이라는 인식이 넓게 확산되었다. 예컨대 1938년 장사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서 그러했고 같은해 4월 <조선민족전선> 창간호 기사에 ‘3․1대혁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인식변화는 1941년 임정 산하 한국광복군 기관지인 <광복>지 1941년 2월 창간호에서 3․1운동을 “1919년의 전민(全民) 대혁명”이라고 규정하는 등 이후 ‘대혁명’이라는 명칭을 자주 볼 수 있다. 1943년 6월 재 창간된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세계 제1차대전 후에 한국에서는 위대한 3․1대혁명운동이 발생했다”는 요지의 창간사를 실었다. 그리고 이후 기사에서 ‘3․1대혁명’ 용어를 자주 볼 수 있다. 해방직전인 1944년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우리 국가가 강도 일본에게 퍠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절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후략)

이상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3․1혁명’ 혹은 ‘3․1대혁명’으로 부르며 ‘운동성’ 보다는 ‘혁명성’을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방 직후에도 변함이 없어 이승만과 김구 등의 연설에서 ‘3․1혁명’ 혹은 ‘3․1대혁명’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제헌헌법 제정을 위해 결성된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초안 전문에도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초안이 국회 본회의 심의과정에서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뀌고 말았다. ‘혁명이라는 문구는 불가하다’고 주장한 조국현(의원)은 “일본에게 빼겼든 그놈을 광구(廣求)하자는 운동인 만큼 ‘항쟁’이라 할지언정 혁명은 아니다. 이태조가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것과 갑오(甲午)운동은 혁명이나 일본하고 항쟁한 것은 혁명이 아니다”고 하면서 ‘혁명이라 하면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이승만(의장)이 “내가 절대 찬성합니다”고 손을 들어주었다. 이전까지 ‘3․1혁명’ 용어를 즐겨 썼고 초안에 동조했던 입장에서 급선회한 것이다. 이후에도 이 문제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평소 ‘3․1운동론’을 지지해온 한민당 주장대로 ‘3․1혁명’이 ‘3․1운동’으로 최종 수정 통과되었다.

이상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소요’에서 ‘운동’으로 다시 ‘혁명’으로 그리고 다시 ‘운동’으로 회구되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헌법적 권위’를 갖게 된 ‘3․1운동’이라는 용어는 그동안 수차에 걸친 헌법개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용어 채택은 매우 중요하다. 엄혹하고 치열했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3․1운동’이 지닌 역사성은 ‘운동’ 차원을 휠씬 넘은 ‘혁명성’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민족내부의 기존체제를 전복한 ‘혁명’은 아니지만 수 천년 내려오던 봉건왕조의 ‘제국에서 백성이 주인되는 민국’을 세운 역사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3․1혁명’이라 지칭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2년 뒤 2019년 기념비적인 ‘3․1절’ 100주년을 전망하며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4. 3․1정신의 역사성과 현재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마치 ‘스프링’과 같아서 누르면 눌리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터지기 마련이다. 역사에 나타나는 여러 ‘난’과 ‘혁명’은 이를 잘 시사한다. 1919년 ‘3․1거사’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타율적 개항이후 진행된 근대화과정이 외세의 간섭, 특히 일제의 침략으로 왜곡되게 진행되자, 이에 저항하는 다양한 형태의 여러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예컨대 부르주아 중심의 갑신정변(1884)을 기점으로 반봉건 ․ 반외세의 기치를 올렸던 갑오동학농민혁명(1894),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을 선도했던 독립협회(1896)활동 등이 ‘역사적 모태’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종언 후 일제의 본격적인 국권침략이 노골화되자 유생층 중심의 가열찬 의병투쟁이 있었으며, 동시에 다양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말하자면 ‘3․1거사’는 앞서 전개된 여러 모양의 민족운동들이 모이고 쌓여져서 일어난 것이다. 다시말해 앞서의 ‘세류’(細流)와 같은 작은 물줄기, 곧 여러 모양의 운동들이 모이고 쌓여 ‘3․1거사’라는 거대한 물줄기 곧 ‘대하’(大河)라는 큰 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3․1거사의 이념과 정신에는 앞서 전개된 여러 민족운동의 정신과 이념이 종합적으로 융합되어 담겨있다. 이를 <3․1독립선언서> 내용에서 찾아보자.

첫째 자주독립정신이다. <3․1독립선언서>첫 대목은 “吾等은 玆에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고 선포하였다. 위 내용에서 보듯 3․1운동이 추구한 주된 이념과 정신은 ‘자주와 독립’이다. 이는 대내외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한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자손만대에 알리며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려했던 것이다. 이같은 자주독립정신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남북으로 나라가 양단되어 있는 분단시대, 이로 인한 주변열강의 역학관계 하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할 때 자주독립의 3․1정신은 기리 계승해 나가야 할 우리민족의 절대이념이자 주요정신이라 할 것이다.

둘째는 자유민주정신(自由民主精神)이다. 일제의 식민통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권을 회복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선언서>에서는 조선백성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함’이며 ‘오직 自由的인 精神을 發揮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자주독립국을 세우려는 근본목적은 “조선인이 본래부터 지켜온 自由權을 지켜 왕성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려한다”(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는, 다시말해 ‘자주민(自主民)’ 곧 자유롭고 민주적인 이념을 제일의 정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자주독립된 나라를 세우려한 근본목적과 취지는 자주독립된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자유를 보장받기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사회, 곧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국가가 지향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자주독립된 나라 건설은 자유민주사회의 종속변수로 국가 백성들의 자유와 민주정신을 담보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 건설은 3․1정신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자유민주정신’은 3․1운동이 우리에게 준 더없이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기리 지켜나가야 할 민족사적 최대 덕목이라 할 것이다.

셋째 인류공영(人類共榮)의 평화정신(平和精神)이다. <독립선언서>에 “조선의 독립은 조선만이 아니라 일본이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중국 또한 몽매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東洋平和로 世界平和와 人類幸福에 필요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풀어 말하면 일본이 침략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향후 한․중․일 3국이 동양평화를 이룰 때 세계평화와 인류행복, 곧 인류공영의 평화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3․1독립선언서>에 담겨있는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및 인류공영의 평화정신은 3․1운동이 일어나기 꼭 10년전 1909년 이토저격을 결행한 안중근의사가 제창한 ‘동양평화론’를 재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가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거론할 여유가 없지만 그는 동양3국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복안을 제시한바 있다. 그가 제안한 ‘3국평화안’은 현재 유럽연합국(EU)에서 거의 유사하게 현실화되었다. 작금 과거사 문제와 독도 및 생카쿠열도(釣魚島) 문제 등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한․중․일 3국의 현실에 유념할 때 매우 주목해야할 정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 더욱이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민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3․1정신의 주요 덕목중의 하나인 인류공영과 평화정신을 체화하고 실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넷째 우리민족이 나아갈 꿈과 비전(Vision)을 제시했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시대가 래(來)하도다.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에 잘 나타나있듯 <독립선언서>에 담긴 또 하나의 3․1정신은 우리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희망과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후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음침한 옛집(古巢)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의 빛을 향해 힘차게 나가자”는 희망찬 꿈과 비전 제시는 새 시대를 향해 한민족 구성원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고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정신을 오늘의 우리는 3․1정신으로 승계하여 분단된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는 ‘흔쾌한 부활’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끝으로 ‘혁명정신’이다. 3․1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태동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함”이라고 하여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체를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 황제가 통치하던 ‘제국(帝國)’에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民國)’ 곧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한마디로 ‘혁명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역사발전은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혁명적 변화의 단초(端初)를 제공한 것이 바로 ‘3․1거사’였다는 점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밖에도 3․1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은 <공약삼장>에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는 격 높은 정신을 또한 이어가야 할 것이다.

 

5.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을 향한 큰 울림의 장을 만듭시다.

내년 이날이면 ‘3‧1독립만세운동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한다. 앞서에서 우리는 3·1만세운동의 남다른 역사성을 성찰하였다. 이상에서 돌아보았듯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운동’중의 하나에 불과한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3·1운동은 타율적 개항 이후 왜곡되게 전개된 정치사회적 제반 모순을 극복할 목적으로 진행된 여러 모양의 세류(細流)와 같은 국권, 민권운동 등 여러 갈래의 물줄기들이 모이고 쌓여 1919년 3월 큰 강 곧 대하(大河)를 이룬 한국근현대사를 구분하는 대 사건이었다.

다시말해 3·1운동은 단순한 운동이 아닌 ‘革命(혁명)’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통치하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단초(端初)를 제공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봉건적인 황제가 통치하던 제국(帝國)의 나라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국(民國)의 나라를 수립한 거사였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3·1운동의 혁명성이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민족 DNA 속에는 ‘운동성’과 혁명성‘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강하게 작동했음을 지난 촛불과 태극기 집회에서도 또 한번 확인된 바 있다. 역사적으로 회고해보면 120년 전에 있었던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모습이 오늘의 상황에 그대로 오버랩 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민족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용기를 보여 온 그래서 후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자랑스러운 민족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축 역할을 다한 한복판에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한없는 자긍심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떠올릴 때 자괴감과 부끄럼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99년 전 3·1운동과 혁명을 견인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다했던 한국 교회와 선배 크리스챤들의 정신과 헌신이 오늘은 과연 어떤 지경에 처했는가에 대한 깊은 회개와 자기고백을 넘어 새로운 각성과 다짐 특히 3·1정신의 현재성을 깊게 성찰하고 이를 어떻게 구현,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큰 울림을 향한 범 교회적운동이 내적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1년 앞으로 닥친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한국교회와 교단들이 함께 고민하며 추진할 과제롤 몇 가지를 예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3·1정신인 연합, 연대정신 구현을 위해 흩어진 여러 모양의 기독교 교파, 교단이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여 100주년행사를 추진되었으면 한다. 둘째 3·1정신을 성찰하고 구현하기 위한 전제로서 무게 나가는 학술대회 과거만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3·1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무게 있고 권위있는 학술대회를 개최준비, 셋째 기념비적인 100주년 행사의 하나로 차단된 남북교류와 소통을 트기위한 말하자면 남북이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행사와 만남의 장을 마련했으면 한다. 이밖에 가시적, 기념비적 사업의 하나로 탑골공원의 정화작업과 동시에 100주년 기념탑을 세우는 일 등을 범국민적 모금운동을 통해 추진했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지난 130년간 민족사와 함께한 한국교회의 역사성을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고 준비하면서 회복해보는 범교단적 범교회적운동이 추진되기를 간절한 마음을 기원한다. 그래서 한국사회를 위해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큰 울림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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