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oint 설교레슨 2: 설교는 예배다

김대진 목사(편집장, 설교학 Ph.D.)

설교에서 설교자와 청중보다 우선되는 핵심요소

설교학적 관점에서 설교는 크게 “메시지중심 혹은 설교자중심 설교(message, or preacher-centered preaching)”와 “청중중심 설교(audience-oriented preaching)”로 나눌 수 있다. 메시지 중심 설교는 전통 설교학, 청중중심 설교는 소위 신설교학(New Homiletics)에서 강조된다.

크레독(Craddock)이라는 미국의 설교학자가 1970년대부터 북미대륙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신설교학은 청중에 대해 무관심, 혹은 무지했던 당대의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설교학에 있어서 ‘청중’에 대한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와 청중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뭔가 좀 켕기는 부분이 있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와 청중보다 우선되는 핵심요소는 없는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설교는 예배다

거의 모든 설교학자들이 설교의 독특성 혹은 차별성을 논하면서 ‘설교는 예배 중에 행해지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설교’와 ‘신학강의’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신학강의가 설교보다 더 설교적? 이라 할지라도 예배 가운데 행해지지 않기에 설교라고 하지 않는다.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설교가 예배 가운데 행해진다는 것이다. 즉 ‘설교는 예배다.’라는 점이 설교를 설교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예배의 요소에 설교가 있고 설교는 반드시 예배의 한 부분에 속해야 한다. 예배와 분리된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예배와 설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특히 현대식 예배 형식에서 설교 전에 찬양 시간을 worship으로 칭함으로 본의아니게 설교를 예배에서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찬양만 ‘worship’이 아니고, 설교도 ‘worship’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다. 설교가 예배가 될 때 예배자들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또한 설교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 이해가 쉬운데, 설교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 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설교로 하나님을 예배하라

청중의 관점에서 설교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Second Helvetic Confession)에 의하면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 (‘하나님 말씀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IS THE WORD OF GOD."  따라서 청중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으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설교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설교 시간에 설교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설교에 있어서 스타 ‘설교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 복음'이 드러나야 한다. 설교가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과 매력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절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이다. 설교가 예배라는 이런 점을 강조한 그림이 바로 다음의 그림이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J.) 의 비텐베르트의 제단화 / 루터의 설교 장면을 통해 개혁신학의 설교론을 제대로 보여줌

이 그림에는 설교자 루터와 청중이 등장한다. 그러나 루터와 청중이 주인공이 아니다. 설교자는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고 청중은 설교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 설교학의 근간이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주님을 바라봄으로 예배한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설교학에서 좋은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설교자가 드러나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각시키고 드러내는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설교가 예배라고 고백한다면 설교자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설교자이기 전에 예배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설교자, 청중 가운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라

독일의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R. Bohren)이 말했듯이, 우리의 설교를 듣는 제일 청자(der erste Hörer)가 바로 삼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 설교자는 청중 앞에 설교하기에 청중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청중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청중들은 설교자의 말을 주로 듣지만, 하나님은 설교자의 마음 중심까지 들으신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청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설교자 중심 설교학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전통적인 설교자 중심 설교학에서 ‘설교자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함으로 청중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설교가 예배의 한 부분일진대, 설교자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은 그 예배 가운데 청중 가운데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청중 가운데, 그 공동체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청중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사람의 눈치를 보며 청중에게 지배당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제일 청자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래 네가 내 마음을 잘 전하는 구나!’ ‘네가 나의 말에 순종하여 설교하는 구나!’ 라는 평가를 들으면 된다. 성령님이 감동하시면 성령의 전인 성도들도 감동하고 순종한다.

코람데오 설교학이 필요하다

설교가 예배라는 관점에서 청중은 소비자도 아니고, 평가자도 아니고, 관람객도 아니다. 설교가 예배라면 설교자는 청중인 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는 생산자나 엔터테이너가 될 수 없다. 설교자와 청중은 모두 기본적으로 예배자이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의 왕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청중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예배하고, 설교자는 제일 청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교함으로 예배한다.

따라서 설교가 예배라고 할 때, 설교의 중요한 요소는 설교자와 청중에게 국한될 수 없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설교가 설교되게 하는 핵심은 코람데오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설교는 ‘코람데오 설교’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청중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이 시대에 코람데오 설교학이 필요하다. 청중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청중이 왕이 되어서도 안 된다. 코람데오 설교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설교자가 코람데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도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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