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길 선교사(동경성서교회)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에 시작되어 1598년 11월 18일에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7년 동안에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당시 조선의 관군과 의병 및 일반 백성들을 포함하여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전국토가 황폐화 되었고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고 약탈당하는 등 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끌러간 것이다. 지금도 규수지방(九州地方)에 세계적인 도자기 산지로 유명하게 된 것도 임진왜란 때에 노예로 끌러간 도공(陶工)들의 후손임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장군들 가운데 대부분 규수지방의 기리시단 영주들이 많았기에 납치된 조선인 포로들은 오오무라 (大村), 아리마(有馬), 나가사키(長崎), 시마바라(島原), 사쯔마(薩摩)、히라도(平戶), 후쿠오카(福岡), 고토(五島), 아마쿠사(天草), 시키(志岐)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납치된 조선인 포로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개 1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리시단 영주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포로들의 선교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에게는 복음이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기에 기리시단(카토릭 신자)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1596년 12월 13일에 루이스 프로이스(L.Frois)는 선교 문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선으로부터 와서 현재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는 남녀 다수의 포로를 교회로 인도하였다. 2년 전에 1,3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고, 올해는 고백성사를 받았다. 그들은 성스러운 신앙에 적합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있고 친절한 그들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들이다.” 라고 했다.

1610년의 예수회 선교사의 연례편지에는 “이 도시에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열의를 갖고 작은 돈을 모아 제법 좋은 땅을 샀고 현재로써는 비용이 부족하여 작은 성당만 세워 성 로렌조에게 바쳤다. 신앙심 깊은 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엄숙함속에서 미사를 올렸고 영혼 구제와 단합을 위하여 훌륭히 세워진 성당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주님께 바치는 봉헌과 그들이 모시는 성인과 영혼의 지복을 위해 그들의 힘을 능가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시도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 불행하게도 일본군에 납치되어 포로로 끌려 왔지만 절망적인 환경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된다. 조선 기리시단들이 이국(異國) 땅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손으로 성당을 짓고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유일한 안식처이었다. 그러나 1620년 2월에 기리시단 박해로 성당은 파괴되고 조선인 순교자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