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평생에 늘 소망하셨던 개혁교회가 이 땅에 건설되기를 빕니다

2015년 3월 3일 신대원 입학식 및 변종길 원장 취임 예배에서 허순길 목사가 “미래를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여호수아 3:1-17)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다(코닷 자료실).

 

고 허순길 박사님을 기리며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장)

 

우리의 존경하는 스승이신 허순길 박사님은 지난 1월 10일 부산 복음병원에서 평안히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84년간 이 땅에 살면서 개혁주의 교회와 생활을 위해 충성 봉사하시다가 천국으로 가신 것입니다. 지난 12일 오전 10시에 복음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진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영정도 없었고 꽃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고인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고 합니다.

고인은 살아 계실 때에 장례식은 가족 중심으로 치루는 행사이며 예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서 ‘장례예배’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족 중심의 의식이기 때문에 사촌동서 되는 이한석 목사님께서 장례순서를 인도하시고 말씀을 전하셨으며, 평생 몸담아 수고하셨던 고려신학대학원의 장이 간단히 기도하였습니다. 이것도 고인이 미리 정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찬송도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을 부르도록 지정해 주셨으며, 성경은 요한복음 11장 25-27절을 읽고 부활의 소망에 대해 간단히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약력 소개도 못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을 높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허 박사님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삶을 사시다가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신의 장례까지도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의 원리를 따라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지정해 주셨습니다. 평소에 개혁주의 원리와 생활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고인의 인생은 일편단심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신 것이었습니다. 비록 어려운 일이 많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주의 원리와 생활을 주장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고 어떤 때는 공허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고인은 굳센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개혁주의를 설파하셨습니다. 많은 글과 책들을 통해 개혁주의를 전파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은 개혁교회의 실제 목회와 삶이 어떠한지를 잘 설명해 주었으며,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인은 1933년 2월 13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덕암 마을에서 부친 허현(許鉉)과 모친 성소심(成小心) 사이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선비였다고 합니다. 고종 황제 때 과거시험을 치러 갔는데 시험지를 바꿔치기 당하는 등 부정부패를 보고는 낙심하여 화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도 곧 세상을 떠나시고 젊은 나이에 고아가 된 아버지는 화전민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사셨다고 합니다. 공부는 소용없고 농사짓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고인을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고인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하셨습니다. 본인의 향학열도 대단하였습니다. 1947년 봄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가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나서 야간 중학교에 다니면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해 여름에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에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박태수 목사님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1954년 9월에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고려신학교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의 가정교사와 조교로 일한 것은 큰 축복이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박윤선 박사를 모신 허 박사님은 박윤선 박사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고인의 향학열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1961년에 고려신학교 본과를 졸업한 후에 계명대학교 교육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이어서 3월부터 고려신학교 강사를 하시다가, 1966년에 화란으로 유학을 떠나 1972년에 장로직에 대한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고인은 화란 유학 중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인품으로 화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셨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8년에 호주자유개혁교회 목사로 청빙받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마지막 병상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시면서, 특히 호주개혁교회에서 10년간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호주개혁교회에서의 경험은 허 박사님의 신앙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인은 1972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후 귀국하여 그 해 6월부터 고려신학대학 교수로 봉사하셨습니다. 약 6년간 봉사하신 후 1978년 1월에 호주로 떠나셨습니다. 10년 가까이 호주자유개혁교회의 목사로 봉사하신 후 귀국하여 1988년부터 다시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와 원장으로 1999년 2월에 퇴임하시기까지 봉사하셨습니다.

1988년 당시의 신학대학원의 분위기는 어수선하였습니다. 송도 캠퍼스에는 신학대학원뿐만 아니라 의예과가 있어서 많이 속화된 분위기였습니다. 신학대학원은 행정적으로 고신대학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옛날의 고려신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 10년을 지내다 오신 고인의 눈에는 이것이 선명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려신학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 교명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회에 말하여 1988년 이사회는 현 교명(고신대학 신학대학원)을 ‘고려신학대학원’으로 개명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그 해 총회에서는 고려신학대학원을 분리 운영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송도 캠퍼스는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병원은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쓰기 원하였습니다. 게다가 신학교를 수도권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고인은 신학교 캠퍼스를 수도권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시고 부지를 물색한 끝에 결국 천안의 현 위치로 정하셨습니다. 당시 IMF의 위기 가운데서도 캠퍼스 신축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어 1998년 9월에 천안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50여년의 부산 시대를 마감하고 천안 시대를 연 것입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것은 고신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큰 발걸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고인은 1999년 2월에 정년퇴임하신 후에도 연구를 계속하시고 책을 쓰셨습니다. 작년에 고려신학대학원 70주년 학술대회에 주강사로 초청받으셨을 때에는 기꺼이 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작년 6월에 폐렴으로 갑자기 입원하신 후에는 늘 산소호흡기를 꽂고 지내셨습니다. 그렇지만 허 박사님은 고려신학대학원 70주년 기념 강연 때에 꼭 하실 말씀이 있다면서 의지를 불태우셨습니다. 작년 10월 26일 오후에 허 박사님은 휠체어를 타고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모두들 염려하였으나 고인은 장장 80분 동안 열강을 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모든 교수들과 학생들과 청중이 일제히 일어나서 열렬한 박수로 응답하였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강연에서 고인은 고려신학대학원 70년 역사를 전부 조망하시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 신학대학원에서는 이것이 매우 소중한 자료라 판단하여, 길지만 이 원고를 지난 번 선지동산에 다 실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고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한평생 변치 않고 개혁교회 건설을 위해 꿋꿋하게 사신 고인이 그립고 존경스럽습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시면서 “여러분도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기 바란다.”고 당부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제 고인의 육신은 이 땅에 묻혀 있지만, 영혼은 모든 수고와 고생을 끝내고 낙원에서 편히 안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도 조만간 다 고인의 뒤를 따라가서 천국에서 고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고인이 평생에 늘 소망하셨던 개혁교회가 이 땅에 건설되기를 빕니다.

 

* 장지: 경남 김해군 주촌면 농소리 80 (가족묘지)

 

* 주요 저서

봉사신학(양문출판사, 1990)

개혁해 가는 교회(총회출판국, 1991)

봉사신학 개론(도서출판 영문, 1992)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총회출판국, 1994)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도서출판 영문, 1996)

개혁주의 설교: 원리와 시행(기독교문서 선교회, 1996)

교회 절기 설교(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한국장로교회사: 장로교회(고신) 희년 기념(총회출판국, 2002)

구속사적 신약 설교(SFC, 2005)

구속사적 구약 설교(SFC, 2006)

잘 다스리는 장로(도서출판 영문, 2007)

한국장로교회사: 고신교회 중심(영문, 2008)

큰 사건, 큰 인물을 따라 교회사 산책(총회출판국, 2009)

개혁주의의 진리와 생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 해설 설교집(영문, 2009)

교리문답 해설 설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2권. 사랑과 언약, 2010)

은혜로만 걸어온 길(셈페르 레포르만다, 2014)

어둠 후에 빛(셈페르 레포르만다, 2014)

박윤선을 생각한다: 『목사의 딸』 유감(합신대학원출판부, 2015)

벨기에 신앙고백 해설(셈페르 레포르만다, 2016)

개혁주의 교회의 신조(고려신학대학원. 미출판. 복사본)

 

Presbyter in volle rechten(박사학위 논문, 1972)

The Church preserved through fires: a history of Korean Church in Korea

(Inheritance Publications, 2006)

Pilgrimage by Grace Alone(W. Huizinga, 2015)

 

역서: 종말론과 정경(영문, 1992)

유고: 교회 질서(교회헌법 해설. 금년 3월 출간 예정)

 

* 고 허순길 박사 연표

1933년 2월 13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에서 부친 허현(許鉉)과 모친 성소심(成小心)에게서 출생

1947년 초여름 어머니를 따라 교회 출석

2017년 1월 10일(화) 오전 6시 복음병원에서 소천

 

1947 봄 초등학교 졸업

1948 봄 함양공립중학교 입학

1954.2. 함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54.9. 고려신학교 예과 입학

58.3 ~ 61.2 고려신학교

61.3 ~ 63.2 계명대학교 교육학과 3학년 편입 졸업(문학사)

66.6 ~ 69.5 화란개혁신학대학원(신학석사, doctorandus)

69.6 ~ 72.5 화란개혁신학대학원(신학박사, Th.D.)

 

1962 여름 강도사

1964.2.10 서문로교회 부목사 취임

63.3 ~ 70.12 고려신학교 강사

72.6 ~ 77.12 고려신학대학 교수

78.1 ~ 87.8 호주자유개혁교회 목사

88.3 ~ 99.2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88.9 ~ 89.9 고려신학대학원장

90.3 ~ 94.3 고려신학대학원장

97.1 ~ 99.2 고려신학대학원장(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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