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중심의 의미 찾기를 넘어 저자의 의도를 찾으라!

글쓴이: 김대진 목사(코닷 편집장, 신대원 외래교수/ 전 서울동산교회, 다니엘교회 담임목사/ 설교학 Ph.D.)

설교는 말로 이루어진다. 말은 행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과 창조 행위가 함께 간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이 순종 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말씀은 살아서 운동한다(히4:12).

성경의 모든 계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구체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대상과 구체적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모세오경은 출애굽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 400여 년간 노예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던 히브리인에게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고 말씀한다. 역사서나 예언서나 복음서나 서신서나 모든 성경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계시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말뿐인 계시는 하나도 없다.

말은 늘 구체적인 삶의 문맥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돌 굴러유!” 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위험을 느끼고 구르는 돌을 피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돌 굴러요”라는 말이 위험을 피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말이 가지고 있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말은 화자(話者)의 의도(intention)를 표현한다. 말을 기록한 글도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다.

“칠주의!”라는 쪽지가 공원 벤치에 붙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칠주의”라는 문구는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를 준다. 페인트가 옷에 묻을 수 있으니 벤치에 않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벤치 근처를 지날 때 조심하게 된다. 그 쪽지를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칠주의’ 라고 기록된 쪽지에는 두 단어의 의미 조합을 뛰어넘는 페인트공의 ‘의도’가 담겨있다. 언어는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화자의 의도를 표현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의도를 안다. 그러나 한국말을 처음 배운 외국인이나, 수백 년 후의 후손들이 문자 의미의 수준에서만 ‘칠주의’를 해석하려 하면 엉뚱한 해석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소꽁이의 하루>의 블로그 운영자는 '칠주의'를 숫자 '7' 주의로 해석해 버렸다고 적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soccong2/70189705049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기록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야 한다. 본문의 의도를 찾지 않고 다른 것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돌 굴러유!”라는 말을 듣고 ‘돌이란 무엇인가?’ ‘돌의 정의’, ‘돌의 종류에는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석회암 등등 있다.’는 것을 논한다고 생각해 보라. 또한 ‘구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미끄러지는 것과 구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물체가 굴러가기 위해서 필요한 경사각도는 어떻게 되는가?’ 등등을 찾는다고 가정해 보자. 돌이 구른다는 의미(meaning)가 무엇일까? 에만 집중해서, 그 말을 하는 화자의 의도(intention)를 듣지 못하는 결과가 생긴다.

말의 의미(meaning)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본적인 의미를 모르고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돌이 무엇인지 알고 구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야 돌 구른다는 말을 이해하고 피할 수 있다. ‘칠 주의’라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를 알아야 페인트를 옷에 안 묻히고 조심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만’을 추구하다 보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독자의 의미 찾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독자의 의미 찾기 수준의 설교가 탄생한다. “돌 굴러요!” 라는 말을 저자의 의도가 아닌 독자의 의미 찾기로만 보면 이런 설교도 가능할 것이다.

설교제목: 구르는 돌이 주는 교훈

대지 1.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대지 2. 돌이 구르기 위해서는 모난 부분이 있으면 안 됩니다.

대지 3. 모난 부분을 제거하면 이끼가 끼지 않는 깨끗한 돌이 됩니다.

결론: 모난 부분을 제거하는 복된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각각의 대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괜찮은 3대지 설교가 탄생했지만 저자의 의도는 하나도 반영이 안 된 설교이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이런 저런 의미들을 찾을 수 있지만 정작 화자의 급박한 경고 소리는 듣지 못한다. 화자의 의도를 듣지 못한 결과는 무엇인가? 돌에 맞아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돌 굴러요! 라는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설교자는 돌을 피하라는 화자의 의도를 주제로 설교해야 한다.

설교제목: 돌 굴러유! 하면 빨리 피해야 한다

대지 1. 작은 돌이라도 구르면서 가속도가 붙습니다.

대지 2. 가속도 붙은 돌에 맞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대지 3. 그러니 돌이 무엇인지 종류가 무엇인지 어떻게 구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듣자마자 빨리 피하십시오.

결론: (죄의) 돌을 피하는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설교해야 화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설교가 될 것이다. 성경 저자의 의도가 때로는 오늘날의 독자들과 청자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전하는 설교자는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 ‘설교를 바르게 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에 관심이 많다. 소위 설교 잘해서 이 시대의 청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도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기는 물거품과 같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전하면, 저자이신 하나님께 인정 받는다. 신실한 전달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를 끝까지 붙들고 쓰실 것이다. 의미(meaning)를 넘어 화자의 의도(intention)를 전하는 설교자가 되자!

화자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읽기와 본문연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찾는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나님 의도를 찾는 데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 다는 것은 내 생각과 의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독자 중심의 성경읽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聽者)의 자세로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하고 읽으라고 권면했다. 성경은 누워서 읽으면 안 되고 옷을 입고 앉아서 읽으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성경 읽기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설교학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요즈음 누가 설교 잘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 사람들은 설교 잘하는 설교자를 찾지만, 하나님은 바르게 설교하는 설교자를 찾으신다. 당신의 의도를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가 어디 있는지? 당신의 마음을 아는 설교자가 어디 있는지?

설교 잘하려다 오히려 죽쒀본? 경험 여러 번 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의도(intention)를 바르게 전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애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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