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19을 통해 본 이신칭의,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걸어가는 삶으로서의 순례

남아공의 크리스마스 시즌, 거의 모든 관공서가 문을 닫고 대학의 도서관도 문을 닫았다. 교계의 이슈가 된 이신칭의 주제와 관련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논문 방어식을 준비하는 예비 학자를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남아공 웨스턴 케이프 주 스텔렌보쉬 시에 위치한 스텔렌보쉬대학교 신학부를 찾았다.

정문은 닫혀 있었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도 닫혀있어 건물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석 박사 과정 학생들의 연구실(큐빅)로 들어가는 쪽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조금 후에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큐빅에 나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은 다름 아닌 한국인 유학생 김중구 목사(총신대신대원 94회)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문세원 목사(고려신학대학원 62회)였다.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박사과정 학생들을 위한 큐빅(연구실)에서 김중구 목사(좌)와 문세원 목사, 큐빅은 한 과에서 한 명 정도의 학생에게만 제공된다.

김중구 목사는 유학 13년 차 박사과정에서 신약신학을 전공하며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를 만나자 마자 코람데오닷컴에서 이신칭의 세미나를 마련하고 잘 보도해 주셔서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김 목사는 성경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있는 개혁주의 교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며, 코람데오닷컴이 자기와 같은 해외 유학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예상치 못한 코닷 애독자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갈라디아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디펜스를 기다리고 있는 문세원 목사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17세기(1685년)부터 시작된 스텔렌보쉬대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 보이는 성경신학부 세미나 실에 마주 앉았다.

편집장 김대진 박사와 인터뷰 하는 문세원 목사

1. 갈라디아서를 연구했다고 들었습니다. 문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위해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 왜 “다른 복음”에 대해 그토록 심각한 경고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왜 복음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복음이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에서 최초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첫머리를 복음이 무엇인지 천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갈라디아서1:4~5).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었던 소망 없는 죄인이 이제 이 악한 세상나라로부터 건짐을 받아,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입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새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앞서 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례자가 되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존전에서 그를 영원히 예배하기 위하여 지금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는(갈4:26), ‘새로운 예배 공동체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았다(갈6:16).’는 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의 실질적인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존전으로 행진하는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외형적인 경건과 열심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다른 복음'은 겉으로는 아주 종교적으로 보이고 열심도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대신 인간만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인간 세상의 중심을 추구하게 만들어 결국 이 세상의 중심-이 땅의 예루살렘(갈4:25)―을 향하여 순례하도록 만듭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토록 분노하며, 심지어 저주하며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갈1:7~8; 5:10). 갈5:8~9의 바울의 누룩에 대한 언급은, 그 다른 복음이,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던 종교적 외형을 추구하느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던 "바리새인들의 복음"(마가복음7:5~9)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인간을 대조시킴으로써, 다른 복음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가르침이요,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천국복음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가르침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다른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아버린다는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2. 한국에서 최근에 미래교회포럼의 이신칭의 세미나가 큰 이슈가 되었고 이로 인해 참된 복음의 회복에 대한 관심과 열망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관심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바울의 복음이 한국교회 콘텍스트(context)에서 과연 제대로 전파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갈라디아서를 전공한 학자로서 왜 이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합니까?

이 문제는 비단 한국교회 뿐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두 부류의 "위기 가운데 있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 출신의 신자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출신의 초신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들 중 누구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내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복음"의 전파자들조차 그러했습니다. 아무도 '이신칭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복음의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위기에 빠진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핍박"과 "십자가" 등으로 대표되는 예수를 따르는 길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로 걷기 시작한 데서 찾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의 외침은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부합한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편지입니다. '이신칭의'의 문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이신칭의'라는 개념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갈라디아서 2:16절은, '믿는 대로 살고 있지 않은' 베드로 (갈 2:11~14)를 설득하기 위해 바울이 호소하는 부분입니다. 한 문장 안에 3번이나 반복된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대조를 통해 바울은 베드로에게, 더 나아가 위기의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알지 않느냐? 경험하지 않았느냐? 성경으로부터 듣지 않았느냐? 외면적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선언으로 의롭게 되지 않았느냐?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걷기 시작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지금 왜 은혜의 삶으로부터 떠났느냐?" 바울에게,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신칭의"는 "자명한 진리"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에 합당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복음으로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3.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믿음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었다는 말씀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매우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도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처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과는 상관없는 삶이 이렇게 팽배해있는가?’ 이게 사실 미래교회포럼의 고민이었습니다. 문 목사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할 때 바울은 믿음을 따로 떼어서 말하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갈 2:20, 4:4~5 등에서 바울은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죄인들을 사랑해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까지 낮아지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존전으로 행진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순례길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것 (갈 6:2),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 여섯 장 가운데 처음 두 장을 자신의 지난 삶을 묘사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자전적 기록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예수님을 따라서 이렇게 살고 있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걸었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있다 (갈 2:19~20). 그렇기에 나는 예수와 함께 나타날 의의 소망을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 (갈 5:5~6).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4. 문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faith in faith”와 “faith in Jesus Christ”의 차이가 생각납니다. 인간의 믿음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린 믿음, 믿음의 대상이 분명치 않은 믿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믿음, 인본주의적 믿음 이런 것이 문제라는 말씀이시지요?

예.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문제를 보도록 요청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과 연관하여 믿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우리의 믿음은 변질 되고 다른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5. 예, 그렇군요. 문 목사님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명료하게 설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문 목사님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Pilgrimage as singing and walking in the way of the law of Christ: interpreting 'dying to the law' in Gal.2:19" (그리스도의 길을 노래하고,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걸어가는 삶으로서의 순례: '율법에 대한 죽음' (갈 2:19)의 해석)이라는 논문 입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시편을 통해 온 회중의 예배적 삶을 요청한 것처럼, 바울 역시 갈 2:19~20의 개인적인 고백을 통해 신앙의 위기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순례를 힘껏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것이 논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6. 논문의 제목 중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dying to the law)”라고 말씀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요?

율법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라고 이야기할 때 오늘날의 성문법처럼 어떤 기록된 법조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조항이냐? 정결법이냐? 아니면 토라 전체냐? 와 같이 질문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대에 율법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배'와 '복종', 그리고 '실천'이라는 실제의 관습과 행위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할례" 등은 몸으로 행하는 법 지킴이요, 손에 십일조와 제물을 들고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는 그 자체로 여호와의 길을 따라 걷는 법 지킴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윤리적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참된 순례로 간주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율법을 "어떤 태도와 어떤 관점에서" 지키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라는 내적인 측면을 배제하여 버리고 나면, 외형적인 율법의 행위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집착 등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법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인간 제국인 당대의 유대주의의 질서에 따라 사는 노예의 삶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방인들에게 할례 등의 율법의 준수를 강제하는 것은 인간 제국에 종노릇하도록 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갈 2:19)고 선언한 것은, 이러한 옛 세상의 삶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무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갈 1:11~12)을 따라, 성령(갈 5:16)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법(갈 6:2)을 성취하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한 떠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의 예루살렘(갈 4:26)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행군하는 순례자의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듯이, 바울 역시 믿음의 순례의 길을 먼저 걸어가는 선배 순례자로써, 후배 순례자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바울을 좇아 (Imitatio Christi, imitatio Pauli) 힘차게 걸어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뷰하는 문세원 목사

7. 제가 볼 때 한국교회에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로 논문을 쓰셨고 앞으로도 이 연구주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 목사님의 개인적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했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M.Div.과정(62회)을 밟았습니다. 저를 사랑하고 길러주셨던 교회들과 지체들의 후원으로 2009년에 이곳 스텔렌보쉬로 와서,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SBL international meeting에도 참석하셨던 Jeremy Punt 교수님의 지도 아래 석사과정에서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을, 그리고 박사과정에서는 갈라디아서를 공부했습니다.

8. 2009년 초부터 공부하셨으면 만 8년을 유학하셨는데 유학 생활 중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일들은 무엇입니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내가 이곳에서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성공이나 유익을 위해서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는데,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였는데, 공부 기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이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저를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기뻤던 순간이라면, 반대로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따금 선교지에서 말씀을 전하거나, 야간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그리고 한인초대교회에서 사역하며 말씀을 가르칠 때, 그들이 말씀을 듣고, 조금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때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습니다.

9. 문 목사님의 논문 방어식이 1월 24일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디펜스 잘 마치시면 내년 3월에 졸업이신데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일단 당장은 지도교수님과 함께 제가 쓴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저널에 아티클을 몇 편 기고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후로 기회가 되면 가르치는 사역에 쓰임 받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사이의 큰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에 대한 고려 없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려가 없기 때문에, 복음이 죽은 문자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었던 복음의 생명력과 능력이 다시 생생히 전달되는데 저의 배움이 사용되었으면 하는 것이 궁극적 소망입니다.

10. 한국에서 공부할 때와 여기 스텔렌보쉬에서 공부할 때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보호받으면서 공부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틀린 것은 배제하고 옳은 것을 바르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이곳 스텔렌보쉬에서는 유럽신학의 현대적 흐름과 전통 사이의 경계선에 서서 우리가 가진 소중한 전통을 현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혹은 현대적 학문의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의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유익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문제, 동성애 문제나 사회참여와 공공신학의 문제 등등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들은 사실 지난 10-20 년 정도 앞서서 남아공 교회들이 치열하게 고민했으며,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고민들을 옆에서 보고 듣는 것은 제게 큰 유익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제가 전해 받은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스텔렌보쉬대학교 신학대학 앞에서

11. 해외 유학생들이 코닷을 많이 보신다고 하니 편집장으로서 보람이 됩니다. 끝으로 보도된 이신칭의의 쟁점 기사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신칭의 문제에 대해서 광장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해 받은 소중한 유산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유산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수될 것인가? 라는 문제를 김세윤 교수나 최갑종 교수, 박영돈 교수 같은 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된 점이 유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신칭의가 케케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실성을 지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고 우리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는 측면에서 큰 공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멀리까지 오셔서 취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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